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림자와 칼」로 아침소설의 문을 연 정찬주 작가가 두 번째 작품 「자화장」에 이어 「무문사에 가서」를 선보입니다. 작품의 배경은 무문사라는 이름의 절집이지만 불교적 상상력에 매달린 작품은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因緣), 사람과 자연의 인과(因果), 천지불인(天地不仁)의 세계 한복판을 걸어가는 우리네 삶이 곧 수행의 길이며 인생의 여로에는 인간의 힘이 어쩌지 못하는 섭리가 가로놓여 있음을 숨이 막힐 듯 아름다운 문장 속에 새겨 놓은 명작입니다. [편집자]
그녀가 부도장(浮屠場) 입구에 서서 합장을 했다. 거기에는 부도탑과 비석이 하나씩 서 있었고, 그것들의 주위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가 있었다.
“이 절을 창건한 스님의 부도예요. 왕이 직접 신하와 석공을 이곳으로 보내 비문을 짓게 하고 돌을 다듬도록 명을 내렸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저 거북의 앞발과 두 눈을 보세요. 꼭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나는 멈칫멈칫 몇 걸음 다가가다 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탑면에 양각된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이 나를 향해 불쑥 달려들 성싶었다.
십이지신장. 병든 사람을 구원해준다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호법신이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괴물들이었다. 어떤 날은 범의 머리를 한 장수가 긴 칼을 들고서 쫓아왔고, 또 어떤 날은 붉은 볏을 곧추세운 닭의 머리를 가진 괴물이 그 톱날처럼 날카로운 부리로 가슴을 쪼아댔다. 그런가하면 또 원숭이 머리를 한 장수가 칼을 휘두르며 망나니 춤을 추곤 하였다. 사격장이 있는 훈련장에서 예비군훈련을 받고난 날 밤부터 그 괴물들이 나타나곤 했었다.
바람이 계곡 아래로 불어 갔다. 우수수 떨어진 낙엽들이 허공을 잠시 노랗게 메웠다. 나는 잔디 위에 앉아서 명하니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곡은 벌써부터 안개 같은 이내가 끼고 있었다. 그 푸르스름한 이내가 새들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한 떼의 새들이 계곡 쪽으로 날아갔다.
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새들 때문이었을까. 나는 문득, 여태까지 그녀와 주고받은 얘기가 공허하게 느껴졌다. 하늘이 더 멀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 앉아 있는데도 아득한 기분이군요.”
이번에는 그녀가 하늘을 응시했다.
“저와의 사이가요…….”
“하긴 늘 그래왔는지도 모르지요.”
“…….”
나는 산봉우리에 얹힌 가부좌 형상의 바위를 바라보며 고향의 그 늙은 스님을 생각했다. 한문을 가르쳐주었던 그 스님은 나에게 맨 먼저 과보(果報)라는 한자를 외게 하였다. 비로소 나는 그녀와의 멀고 먼 거리와 십이지신장의 나타남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훈련 날이었죠…….”
사격을 일찍 끝낸 우리들은 연병장 가로 가서 나무그늘을 찾았다. 사격을 못한 나머지 인원의 훈련이 끝나려면 한나절은 좋이 기다려야 했다.
그런 공백이 가장 무료했다. 호주머니에 숨겨온 신문을 꺼내 읽는 것도 지겨웠고, 누워 있는 것도 거북했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는 것도 어색했다. 연병장 안에서 어정거린다는 자체가 따분했다. 무료함은 사람을 곧 지치게 했다.
모두가 그렇게 지쳐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덤불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그 돌멩이가 날아간 부근에는 메꽃이 딱 한 송이 피어 있었다. 무료한 시간에 장난거리를 하나 발견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돌멩이가 금세 수십 개나 날아갔다. 꽃이 꺾인 뒤까지도…….
“십이지신장이 그날 밤부터 나타났지요. 나를 닦달하듯 말이죠.”
“메꽃을 죽인 과보 때문이라는 거죠.”
“잘 믿어지지 않는, 어찌 생각해보면 황당해지기도 해요.”
“메꽃이 여래(如來)가 되겠네요. 십이지신장은 약사여래 부처님의 수호신이니까요.”
“…….”
“그 메꽃은 내년에 다시 필거예요. 돌멩이를 원망하지 않고 자연의 섭리에 의해 말이에요. 그린 성품을 불성(佛性)이라고 해요.”
허공은 아직 날빛이 희부옇게 가득 차 있었다.
“화해하는 마음이 불성이라는 말이죠?”
“그래요.”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한 말이 오랫동안 귓속을 맴돌았다. 메꽃은 내년에 다시 필거예요. 자연의 섭리에 의해 말이에요. 그런 성품을 불성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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