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오랫동안 전통과 역사에서 찾은 미감, 그런 미감을 품은 현대적 공간을 구현해 왔다. 한국 고유의 정서와 미감을 동시대 공간에 창의적인 방식으로 구현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부끄럽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많고, 여전히 그 해답을 찾아가는 중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도하고 실험하며 실패와 배움을 얻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미감에 관한 것이다. 미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각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매우 주관적이고 사적인 출발이지만, 이 주관적인 생각들이 시대적인 것과 만나 만들어지는 현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국식 방을 새롭게 제안해 보는 이번 전시에 참여해 한지라는 종이에 주목했다
종이의 물성 그 자체보다 지극히 연약한 소재를 방 그리고 건축이라는 강하고 견고한 장르에 사용하는 역설적 관점을 생각했다. 연약한 한지의 사용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햇빛을 투과할 정도로 약하고 부드럽기에 선조들은 종이로 창문으로 만들어서 사용했지만, 때로는 울퉁불퉁한 흙벽에 붙여 마감 소재로도 썼다. 개인적으로 한지의 정점으로 꼽는 것은 바닥이다. 바닥 소재는 내구성이 전제돼야 함에도 과거 한국에서는 바닥에 한지를 사용해 왔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다. 손으로 잡아당기면 찢어지는 약한 소재가 방을 만들고, 나아가 건축 소재가 된다는 것. 이토록 모순된 지점에서 발견하게 되는 철학적 관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지닌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연약한 종이를 이어 붙여 거대한 벽면을 만들고 천장에 매달아 설치한 방을 구성했다
중력에 대한 거스름이라고 할까. 매우 가볍고 약한 소재가 인생의 역경이나 모순처럼 중력을 거슬러 어딘가에 걸린 장면이 만들어내는, 매우 단호하고 강한 에너지 혹은 두 종류의 상반된 가치가 공존하는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시도 덕분에 전시장에 작품을 설치할 때 여러 번 벽면이 떨어져 애를 먹었다.
방의 이름은 ‘부드러운 은신처’다. 관객에게 무엇을 제안하는 방인가
한지라는 재료의 물성이 지닌 식물적인 따뜻함. 혹은 한지를 사용하다 파손되면 오린 종이를 풀로 붙여 복원하는 방식에서 스스로 치유하는 공간과 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부드러운 은신처’라는, 인간이 어떤 공간에서 느끼는 매우 적절한 기분에 관한 것이다. ‘적당하다’고 표현해 온, 적절함이라는 미학은 다양한 요소가 모여 복합적으로 이뤄내는 매우 균형 잡힌 감각이다. 지금은 현대사회가 풍요로운 물질 문화를 누리고 있으나, 공간적으로 적당한 스케일이 주는 안정된 기분에 관해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부드러운 은신처’의 담을 넘어 대문 안으로 들어오면 사랑채로 마련한 열린 양식의 대청마루와 안채로 볼 수 있는 조금 폐쇄적인 정자가 있다. 이 두 장소가 전하는 공간적 안정감이 현대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방 안의 뷰는
공중에 떠 있는 정자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공간감이다. 아무도 없을 때는 체감이 안 되지만, 누군가 그 사이로 지나가면 공간적 깊이가 훅 생성된다. ‘부드러운 은신처’에서 정자를 둘러 산책을 하면서 담장 밖에 있는 병풍이나 지화로 만든 작은 화단,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작게 흔들리는 한지의 가벼운 존재감, 레진으로 만든 디딤석을 발견해 주길.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지만 부드러운 감촉과 따뜻함을 지닌 한지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개인적인 기억과 소회를 바탕으로 소환하고 싶었던 것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공간은 멋진 곳, 값비싼 곳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공간적 안도감이다. 이는 ‘크다’ 혹은 ‘작다’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멋지다’ ‘멋지지 않다’는 개념도 아니다. 내 몸과 마음이 안도하는 공간, 너무 평평하거나 울퉁불퉁한 것을 투정하지 않는 유연함 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한국 전통의 공간 디자인 양식이나 요소를 현대생활과 밀접하게 연결시키려면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이 시대에 전통미를 적용할 때는 환경적 장치를 고려해야 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주요 소재인 한지를 매우 현대적인 방식으로 사용했다. 한지의 약함을 강조하기 위해 철판 위에 한지를 붙여 매우 약하면서도 강한 느낌을 만들고 싶었다. 천장에 매달린 방에도 아크릴 혹은 유리처럼 매우 현대적인 소재와 결합해 섬세한 감각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한지를 붙여 만든 티 테이블은 민속 박물관이나 책자에서 힌트를 얻었다. 어쩌면 이 시대에 가장 영감을 주는 것은 우리들을 존재하게 해주는 뿌리가 아닐까 싶다.
한국적인 스타일을 한 단어 혹은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적당함과 검박함, 유연함. 드러나지 않지만 고유한 것. 규정하지 않지만 지혜로운 것. 물리적으로 측량할 수 없는 스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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