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프리즈 서울’에서 ‘아티스트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소감이 어떤가요
아무래도 동기부여가 됩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규모가 큰 조각이나 설치미술 작업을 하는 게 쉽지 않은데, 이번에 지원을 받아 두 점의 신작 ‘글로리아’와 ‘화이트 홈 월: 웰컴’을 선보이게 됐습니다. 앞으로 몇 년은 더 해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은 것 같아요.
이번 프리즈의 주제는 ‘기술의 진보’였어요. 폐냉장고, 에어컨의 외피 같은 주거공간의 사물을 해체해 조각적으로 재구성해 온 당신의 작업은 언뜻 보기엔 그 반대편을 향합니다
처음엔 저 역시 의아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기능이 제거된 기술집약적 기계의 몸체로 작업해 왔어요. 만약 기술을 단순히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나눈다면 제 작업은 기술의 진보와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오히려 대척점에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기술의 물성이 무엇인지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파이프 작업 ‘글로리아’를 통해 그 숙제를 푼 것 같습니다. 파이프 안에선 유체와 신호들이 움직이고, 촘촘한 망처럼 도시 전체로 퍼진 이 파이프들은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하죠. 그런 점에서 파이프는 단단한 물질인 동시에 비물질적인 기술의 궤적이라 할 수 있어요.
그런 파이프 조각을 벽에 장식해 동물의 뿔 같은 헌팅 트로피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트로피’의 파이프들은 수전입니다. 수전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파이프 배관의 끝자락이에요. 수전의 라인 자체는 굉장히 공업적인데 그걸 조각적인 제스처로 절개해서 펼쳤습니다. 파이프뿐 아니라 가전제품도 그렇고, 저는 작업 대상을 전리품처럼 다루는 측면이 있어요.
전시장 입구 천장에 걸린 또 다른 작품 ‘화이트 홈 월: 웰컴’은 1992~2008년에 생산된 에어컨의 외피들을 시간 순서대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시기를 특정한 건 아닙니다. 고물상 같은 데서 가전을 구하다 보면 대개 그 정도예요. 가정집에서 쓰는 제품의 평균수명이 10년 이내라 중고로 돌다가 완전히 쓸모를 다하기까지 약 20년이 걸립니다. 정렬 기준은 항상 있지만 전시마다 바뀝니다. 황변된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색온도 순으로 배치하기도 하고, 냉장고 작업은 ‘지펠’만 모으기도 했어요. 같은 소재라도 정렬 방식을 다르게 하며 변주해 왔는데 이번엔 생산 연도가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죠. 프리즈 서울은 짧은 시간 내에 엄청난 스트림이 발생하는 밀도 있는 시공(時空)이다 보니 이클립스처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홀이 떠올랐어요.
아트 페어에선 미술품도 가전제품처럼 쉽게 팔립니다. 코엑스 인근 한강 변의 어느 아파트 시세가 330억 원이니 누군가에겐 일상적인 일이겠죠
한편으로는 상품들의 시체로 다가올 소비에 대한 의미심장한 기념비를 세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 극단의 소비가 일어나는 곳이니까요.
백색가전을 소재로 한 작업들은 한국 사회의 단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산업화 이후 한국의 홈 인테리어나 한국인의 관습, 생활은 가구 디자인이 아니라 가전 발전사로 추정 가능하죠. 외국에선 당신의 작업을 어떻게 바라보나요
사실 백색가전의 개념을 보급한 건 미국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너럴 일렉트릭(GE)에서 만든 가전제품이 대부분 흰색이었죠. 그래서 내 사업자 이름이 ‘고은 일렉트릭’이에요.
당신의 영문 이름 이니셜이 ‘GE’라는 걸 지금 알았어요
하하. 미국에선 ‘화이트 · 블랙’ 가전이 ‘여성-남성’ 용품으로 나뉩니다. 컴퓨터 모니터나 스피커 같은 건 어두운 색이고, 부엌에 놓이는 용품은 주로 밝은색이죠. 아무튼 2019년 뉴욕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 스탠딩 에어컨을 가져갔는데, 그때 반응이 좀 신기하긴 했습니다.
토마스파크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Disillusionment of 11AM〉을 말하는 걸까요
맞습니다. 일단 스탠딩 에어컨을 바다 건너 동양에서 온 빈티지처럼 보더군요. 그곳에선 대부분 라디에이터를 쓰기도 하고, 우리처럼 빨리 제품을 바꾸지 않으니까요. 그 다음으로는 자신들의 미니멀리즘 역사와 모양새가 닮아 있다는 걸 인식했어요. 물론 실제로 연관이 있고 그게 내 작업 내용이기도 합니다. 껍데기만 남은 채 기이하게 토착화된 한국의 미니멀리즘 양식이 이런 걸 만들어내니까요. 성별에 따라 다른 관점을 내비치기도 하죠. 한국계 미국인 여성 큐레이터가 결혼 제도 안에서 백색가전에 주목했다면 멕시코의 한 남성 큐레이터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백색의 의미를 찾았어요.
‘조선백자’ ‘백의민족’처럼요
비슷합니다. 레디메이드 작업은 각자의 개인적 경험에서 접속하니까요. 한국에서는 ‘오늘날의 추상, 추상적 형태’라는 맥락에서 내 작업을 읽기도 합니다. 그런 다양한 시각이 재미있어요.
레디메이드 작업은 2016년 첫 개인전 〈토르소〉부터 이어져왔습니다. 계기가 궁금합니다
대학원을 막 졸업한 무렵이었습니다. 전공이 조소니까 학교에선 주로 기법을 배웠는데, 난 그보다 어떤 상태의 물질을 쓸지 고민했어요. 같은 나무라도 원목보다 합판이 내겐 더 자연스러웠죠. 주변이 다 그런 기성품이니까요. 안 그래도 얼마 전 다른 일로 그때 쓰던 물건을 돌이켜봤는데 참 별것 없더군요. 전구, 소화기, 이불, 에어컨,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들. 생활을 위해 반드시 공간에 구축돼야 하는 환경인데 눈에 띄면 안 되는 물건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공간을 구성하는 이 사물과 내가 촉각적인 경험으로 관계를 맺는다는 게 중요했습니다.
시작은 냉장고입니다. 왜 냉장고를 잘라야 했나요
아침에 혼자 집에 있는데, 부엌에 있던 냉장고가 눈에 들어왔어요. 조각처럼 수직적 질서를 지닌 이 냉장고를 평상처럼 낮은 모양으로 변화시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잘라서 눕힌 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자르기 시작했어요(웃음).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코끼리와 아버지까지 닥치는 대로 냉장고에 넣고 닫아버린 박민규의 단편소설 〈카스테라〉가 생각납니다. 다음 차례는 무엇인가요
내년에는 나무 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도마로 많이 쓰는 엔드그레인을 생각하고 있어요. 계속 자르고 가르는 일을 해왔는데, 어떻게 보면 도마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무대죠. 무대로서의 조각, 그런 걸 해보고 싶어요.
창원조각비엔날레에서도 대형 신작을 선보입니다. 철기시대의 유물과 조개더미를 보존한 ‘성산패총’에 설치된다고 들었습니다
유물전시관 2층 발코니의 여섯 개 기둥 사이에 들어가는 스탠 파이프 소재의 스프링 작업입니다. 패총은 아주 오랜 과거인데, 이곳 발코니에 올라서서 밖을 보면 공장지대가 펼쳐집니다. 인근 대나무 숲에선 새들이 지저귀고 바람 소리, 나뭇잎 소리가 들리는데 그와 함께 공장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낮게 깔립니다. 마치 두 개의 시간대가 공존하는 것 같죠. 복원력을 지닌 스프링은 이 둘을 엮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변의 자연과 공장 풍경을 프레이밍(Framing)해요. 스프링 자체는 산업적인 곡선이지만 피치를 늘리면 점차 자유 곡선으로 변합니다.
인왕산의 능선과 하나가 된 지난해의 작업 ‘썬베이크’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표현방식은 더 과감해지는 것 같아요. 앞으로 작업이 기대됩니다. 그나저나 작업실 벽에 붙은 저 기묘한 말 그림은 뭔가요
아, INTP의 일 처리 방식이라는데, 반성하기 위해 붙여놨어요. 시작만 있고 전개가 없으면 저렇게 엉뚱한 결말이 나온다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16년 첫 개인전 〈토르소〉를 시작으로 용도 폐기된 주거공간의 사물, 포스트 산업사회의 유물을 조각적으로 변용한 설치미술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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