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소월로와 인접한 한남동 골목, 백색 벽돌이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는 집에는 의류 브랜드 미미씨엘의 대표 부성희가 살고 있다. 남편,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는 이곳은 부성희가 만드는 옷처럼 담백하고 실용적이다. 도로까지 건물을 바짝 붙여 담장을 높게 세운 주변 주택과는 달리 집은 층이 높아질수록 남산을 향해 조금씩 후퇴하는 형태다. 설계를 맡은 바이아키텍쳐 이병엽 소장은 집의 토대가 땅과의 조응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경사를 따라 각 층이 조금씩 물러나는 게 설계의 기본 방향이었어요. 자연스럽게 단이 형성되면서 테라스 등의 외부공간이 만들어지고, 창밖 도로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죠.” 도로와 면한 대문과 차고는 좀 더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데, 자연스럽게 처마를 만드는 동시에 건물의 위압감을 상쇄하려는 의도다. “백색 벽돌과 상반되는 어두운 출입구는 일종의 깊어지는 감각을 더하는 장치예요. 분주한 도심에서 벗어나 한결 차분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설 수 있죠.” 대문을 지나 맞닥뜨리는 것은 현관 겸 계단실. 심플하기 그지없는 집 안팎을 통틀어 계단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몇 안 되는 요소 중 하나다. 계단에 대한 클라이언트의 막연한 로망을 건축가는 ‘이 집만을 위한 오브제’로 풀어냈다. 화려한 패턴의 타일과 간접등으로 치장돼 있지만, 계단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진정한 요소는 빛이다. 측면의 선큰 공간, 위층에 난 창 덕분에 어두울 틈이 없다. 때론 강하게, 때론 은은하게 떨어지는 빛이 계단의 양감을 부각하며 환대하는 분위기를 만든다. 깔끔한 것을 선호하는 부부의 성향은 집 안 곳곳에 투영됐다. 흰 벽과 바닥을 배경으로 TV, 소파, 다이닝 테이블, 아일랜드 키친이 자리 잡은 거실 풍경은 눈에 거슬리는 게 없다. 언뜻 보면 집보다 쇼룸 또는 갤러리 같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의 단면이다.
부성희는 브랜드 대표로서 SNS에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일의 특성상 일상 속 장면들을 자주 보여주다 보니 공간의 어떤 부분이 나와도 보기 싫지 않았으면 했어요. 종종 집을 배경으로 촬영할 때도 있어 이질감을 낮추고 싶었고요.” 아일랜드 식탁에 인덕션이 설치돼 있지만, 그와 별개로 거실 안쪽에 또 다른 주방이 있다. 아무리 깔끔하게 써도 지저분해지기 쉬운 주방. 조리 과정에서 냄새가 퍼지기도 쉬워 애당초 벽으로 거실과 완벽히 분리해서 효율성 높은 수납공간을 꾸렸다. 아일랜드 키친은 손님에게 내놓을 차를 끓이거나 간단히 음식을 데우는 정도로 활용한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1년, 부성희의 작은 바람은 이 집을 자신의 ‘화이트 큐브’로 만드는 것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갖추고 싶지 않았어요. 과거엔 끼워 맞추듯 가구 세팅에 완벽을 기했는데, 앞으로는 무리하지 않고 정말 마음에 드는 가구로 채우고 싶어요. 좋아하는 예술 작품을 차근차근 모아 저만의 갤러리처럼 만들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거실에 이배 선생님 작품을 걸고 싶네요. 테라스의 소나무와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부부의 침실과 두 자녀의 방, 욕실이 있는 2층은 거실처럼 군더더기 없다. 여백이 깃든 공간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김없이 빛. 손잡이조차 없는 방문을 모두 닫으면 온통 흰 복도만 남는데, 단조로워질 찰나에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시시각각 다른 음영을 드리운다. 이병엽이 둔 또 다른 묘수다. “아래층에서 느낀 빛에 대한 감각이 2층까지 이어졌으면 했어요. 문 손잡이는 굳이 달지 않았어요. 목적성이 강한 요소라 보이는 순간 손을 뻗게 되니까요. 이를 생략함으로써 공간을 한 번 더 만지고 느낄 수 있어요.” 타인의 필요를 자신의 언어로 구체화하고 충족하는 것. 옷을 만드는 일과 집을 짓는 일의 공통점이다. 두 사람의 언어가 교차하는 집은 저만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무르익어갈 것이다. 천천히, 그리 소란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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