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이하 ‘백설공주’, 연출 변영주, 극본 서주연, 제작 히든시퀀스·래몽래인)에서 백설공주는 누구였을까요.
개인적으로 고정우(변요한 분)였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의 자식이고, 피부도 하얘 입술도 빨개 마음씨도 착했던 백설공주처럼 고정우는 인덕 갖춘 좋은 부모(안내상·김미경 분)에서 나서 공부도 잘해 운동도 잘해 약자를 보듬는 심성까지 지닌 완벽한 친구였습니다.
평소 마을 사람들은 정우를 향해 칭찬도 후하게 하고 자랑스러워했고, 나 또는 내 자식과 비교될 때 속은 쓰려도 겉으론 칭송을 보내던 무천마을의 왕자님 고정우입니다.
그러나 내가 또 내 자식이 살인자로 몰릴 위기에 처하자 사람들의 애써 숨겨온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저 ‘저는 아니에요’ ‘제 자식은 아니에요’로는 혐의를 벗어나기 부족해서도 그랬겠으나 이참에 눈엣가시처럼 혼자만 잘났던, 지금껏 좋은 일 많이 누렸으니 이번엔 너희가 당해보란 듯 정우를 ‘친구 2명을 죽이고도 시신의 위치조차 함구하는 악마’로 만들고 정우의 엄마와 아빠는 ‘그 악마를 애지중지 키운 죄인’으로 낙인찍었습니다.
무천마을 주민 중에서도 정우네 가족과 가까웠던 이들은 마치, 20년 쌓아오고 숨겨온 시기와 질투를 한꺼번에 폭발시키듯 그렇게 잔악무도한 살인마와 부모로 몰아갔습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안긴 것이지요.
백설공주 고정우는 정말 외로웠을 겁니다. 백설공주는 독사과를 먹고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지만 그의 생환을 기다리는 일곱 난장이가 곁에 있었지만. 정우는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 있을 때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 고독의 연속이었고, 겨우 찾아온 이라곤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 정우가 살인범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독점하기 위해 철창 속에 정우를 가둔 최덕미(배우명 최나겸, 고보결 분)였으니까요.
이제 서른 줄에 들어선 고정우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입증하려는 때, 무천마을 대부분 사람은 반기지 않습니다. 아니, 죽일 듯 덤벼들어 내쫓으려고만 합니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놀았거나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고 살뜰히 아꼈던 친구도, 정우를 자식처럼 대하던 친구의 부모들도, 정우를 감옥으로 보낸 경찰들도 모두 무죄 입증에 나선 정우가 불편하기만 합니다. 불편을 이유로 추방을 도모하기도 하고 죽이려고도 합니다.
그런 정우에게도 편이 있으니 무천경찰서 강력팀장 노상철(고준), 무천가든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는 하설(김보라 분)입니다. 이들은 10년 전 사건 당시는 물론이고 무천의 역사 속에서 정우와 어떠한 연관도 없는 ‘객관적’ 인사들이고, 처음엔 정우의 편에 선다기보다는 정의와 진실의 편에 서면서 정우의 둘도 없는 뒷배가 되는 인물들입니다.
살인사건 현장에 있었으나 공범으로 몰리기 두려웠던 윤건오와 그의 지적장애인 수오, 쌍둥이 형제(이가섭 1인 2역 분)는 방관자입니다. 그 누구보다 정우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정우를 좋아하지만, ‘내가 먼저’인 이기심과 살인자가 되리라는 두려움에 건오는 경찰 아버지 현구탁(권해효 분)의 사건 조작에 눈을 질끈 감았고, 목격자인 수오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소수지만 정우의 유죄를 의심하다 결국 무죄를 믿어주는 상철과 설, 아무것도 신고하거나 폭로하지 못했으나 정우의 무죄를 아는 건오와 수오. 이들을 연기한 세 배우 고준, 김보라, 이가섭은 수적으로는 딸려도 정의와 인간미를 지키는 사명감으로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했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 없고, 혈혈단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는 정우의 힘겨움을 강화한 건 살인 현장에 있었던 병무(이태구 분)와 민수(이우제 분), 각각 그들의 아버지 양흥수(차순배 분)와 신추호(이두일 분), 사건 은폐와 왜곡을 주도한 현구탁 서장, 역시나 현장에 있었던 정신과 의사 박형식(공정환 분)과 그의 남편이자 사건 왜곡을 지시한 예영실 의원(배종옥 분)이었습니다. 이들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은 누구보다 뻔뻔하고 느물거리게, 충실히 맡은 바 임무를 다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본인들이 당사자거나 사건 연루자이므로 그 뻔뻔한 이기심과 막무가내식 고정우 범인 몰기가 이해됐습니다.
필자의 눈에 크게 들어온 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사건 자체 혹은 사건의 범인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인물, 직업이 경찰일 뿐인 건데 그 누구보다 ‘고정우 살인범 만들기’에 혈한인 캐릭터. 형사과장 바라기였고, 고정우를 시신 없는 사건의 살인마로 만들면서 형사과장이 된 김희도 형사(장원영 분)입니다.
김희도는 그야말로 비호감에 얄밉다 못해 때려주고 싶은 인물입니다. 고정우와 이런저런 연고가 없기에, 그것은 다시 말해 고정우를 미워할 아무 근거도 없으면서 자기 확신과 부실 수사 속에 이제 피어나지도 못한 청춘을 살인마로 만들어 감옥으로 보내는 주범입니다. 치켜뜨는 눈썹과 백안시하는 눈동자, 입술을 까뒤집으며 내뱉는 막말과 귀에 거슬리는 금속성 목소리. 등장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깨닫습니다. 외롭디외로운 고정우가 자신의 무죄 입증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힘, 시청자에게 고정우의 무죄에 대한 확신을 주는 캐릭터구나! 김희도(장원영 분)에게 부정적 감정이 실릴수록 우리는 고정우(변요한 분)의 유죄를 의심했고, 배우에 대한 일말의 호감도를 일체 포기하고 작품을 위해 열연한 장원영 덕에 변요한을 향한 응원과 호감의 마음이 커졌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김희도 역은 ‘기능적으로’ 충분했을 텐데, 연출을 맡은 감독 변영주와 극본을 쓴 서주연 작가는 한 발 나아갔습니다. 김희도조차 현구탁의 용의주도한 사건 은폐와 조작의 큰 그림에 쓰인 ‘말(馬)’일 뿐이고, 10년 전엔 몰랐으나 지금은 김희도 스스로 현구탁 실험실의 ‘성실한 실험쥐’였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성실한 실험쥐, 김희도에게 자신 혹은 자녀의 잘못을 은폐할 의도가 없고 굳이 범인이 고정우여야 할 시기와 질투도 없기에 ‘도리어 순수하게’ 자신의 책무를 다한다는 착각 속에 ‘매우 요긴하게’ 현구탁의 손발이 되어 열정적으로 고정우를 살인마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얼마나 바보처럼 또 쉽사리 이용당한 줄 알게 된 김희도의 현구탁을 향한 표정은 거칠게 바뀝니다. 김희도를 기능적으로 쓰고 버리지 않은 선택, 배우 장원영의 호연이 일궈낸 결과입니다.
사실 악역을 한다는 건 쉬울 수도 너무나 어려울 수도 있는 연기입니다. 평면적 악역은 상대적으로 쉬울 수 있고 동기를 지닌 다층적 악역은 표현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 장원영은 두 극단의 어디에도 서지 않았습니다. 평면적 악역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가스라이팅 당한, 누구보다 ‘성실한’ 실험쥐 상태였고 뒤늦게 자신의 포지션을 깨달은 뒤에는 눈빛이 또렷해졌습니다. 각각의 상태와 상황을 넘치지 않게 표현함과 동시에 향후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게 연기했고, 욕을 제대로 먹어야 할 때는 욕받이로 명확히 역할 했습니다.
다른 어떤 캐릭터보다 돋보이지 않을 수 있고, 합리적 변명이 주어지지 않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내는 일. 작품을 살리고 배우 장원영을 살리는 길입니다. 덕분에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은 더욱 단단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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