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 밖으로 강산의 풍경이 쾌속으로 재생되다 어느 순간 속도가 잦아든다. 목적지인 영월에 도착한 것이다. 영월을 동서로 가른다는 서강에 다다르자 멀리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괴석이 보인다. 이 지역의 유명 석회기암인 선돌이다. 선돌이 우뚝 서고 서강이 휘돌아 나가는, 예사롭지 않은 절경. 과연 김삿갓의 고장답다. 방랑시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배경이 있을까. 강을 건너고 구불구불 시골길을 달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이하 더한옥)에 도착하니 따뜻한 미소를 띤 전담 버틀러가 반긴다.
더한옥은 1990년대에 IT 기업을 창업한 1세대 벤처 사업가인 조정일 대표가 10년 가량의 세월을 투자해 완성한 한옥 공간이다. “한옥은 운치 있지만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건축양식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맞은 공법으로 현대 한옥을 제대로 만들어 그 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훌륭한 전통 건축양식인 한옥이 미래지향적으로 재창조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오랜 공부를 거쳐 자신이 직접 건축가로 나서고 18명의 장인들과 협업해 더한옥을 완공한 조정일 대표는 방음과 보온, 난방, 차음 등 한옥의 불편함으로 손꼽히던 요소들의 공법을 크게 개선했다. 나무를 연구하고 발품 팔아 터를 찾고 장인을 찾으며 일군 일이다. “더한옥을 짓기 위해 워싱턴 주에서 한옥 건축에 적합한 대목을 골라 들여온 뒤 저희가 직접 개발한 마이크로웨이브 기계로 6개월간 건조했습니다. 자연 건조하려면 10년이 걸리는 일이죠. 건조를 마친 나무는 이곳 영월에서 2~3년을 두고 환경에 적응하는지 지켜봤습니다.”그렇게 단단해진 나무는 대목장이 정으로 내리쳐도 깎이지 않고 도구가 튕겨 나오고, 여느 목재처럼 변형되거나 뒤틀리지 않는다. 바위처럼 강도가 높아진 나무는 기계를 사용해 수치화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정밀 가공했다. “한옥이 소리에 취약하다지만 잘 건조된 나무로 집을 지으면 소음이 없습니다.” 나무를 제대로 건조하지 않고 목재 내 수분 함유량인 함수율이 높은 나무를 사용한 한옥들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문화재를 복원할 때 승인되는 함수율 기준이 25%, 하지만 더한옥에 사용된 목재는 이들이 직접 개발한 마이크로웨이브 기계로 건조해 함수율을 15%까지 낮췄다. “대목장들이 목재뿐 아니라 이곳에 초석을 놓는 일부터 마지막 기와를 얹는 일까지 관리합니다. 그렇게 지은 한옥들이죠.”
버틀러의 안내에 따라 하룻밤 묵을 영월종택 별채로 향했다. 서강이 300°로 휘감아 흐르고 겹겹이 쌓인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안온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감도는, 말 그대로 ‘배산임수’ 조건을 갖춘 부지 덕분에 근경과 중경, 원경이 한옥의 정석처럼 펼쳐진다. 산수화처럼 첩첩이 쌓인 산의 능선들이 원경, 병풍처럼 펼쳐지는 선돌 명승지가 중경, 소나무 숲과 한옥이 어우러진 자연이 근경으로 한눈에 들어온다. 더한옥은 이 땅에 자라던 귀한 소나무 군락을 중심으로 두 동의 영월종택과 선돌정이라는 이름의 단독 별채를 열었고, 현재 전통 한옥 양식으로 지은 호텔동 역시 준비 중이다.
여독을 풀기 위해 들어선 영월종택의 사랑채에선 나무가 주는 단아하고 우아한 힘이 느껴진다. 제일 먼저 활짝 열린 누마루에 올라 잠시 누워본다. 가만히 보니 기왓장의 색상이 모두 다르다. “기왓장을 구워내는 시간과 온도가 만들어낸 차이입니다.” 방을 정비해 준 버틀러의 말. 흔히 사용되는 검은색 기와와 달리 사계절 자연의 변화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굽는 시간과 온도에 차이를 둬 자연스러운 색상의 기와를 만든 것이다. 이토록 촘촘하게 디자인된 안온함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경험. 영월의 아름다운 산세와 물의 일렁임 그리고 소나무 숲 사이로 오가는 바람까지.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한 온전한 사색과 휴식이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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