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부산=이영실 기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간다천 음란전쟁’(1983)으로 데뷔한 뒤 영화 ‘큐어’(1997)를 통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도쿄 소나타’(2008)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심사위원상, ‘해안가로의 여행’(2014)으로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감독상을 받았으며 ‘스파이의 아내’(2020)로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주요 연출작으로 ‘회로’(2001), ‘밝은 미래’(2002), ‘절규’(2006) 등이 있다.
작가 고유의 뚜렷한 개성으로 많은 팬을 확보하며 일본 영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BIFF)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The Asian Filmmaker of the year) 수상자로 선정돼 부산을 찾았다.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은 아시아영화 산업과 문화 발전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 아시아영화인 또는 단체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지난 3일 개막식에 이어 4일 공식 기자회견에 참석해 취재진과 만나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 소감부터 신작에 관한 이야기, 연출 철학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부산에 여러 번 방문했는데 올해는 특별하다. 명예로운 상을 받게 됐기 때문”이라고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소감을 전했다. 이어 지난 2일 참석한 개막식을 언급하며 “정말 화려하고 훌륭한 개막식에 참가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화려하고 훌륭한 자리는 처음이었다”라더니 “그렇게 긴 레드카펫도 처음”이라고 덧붙여 웃음을 안겼다.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서는 “정말 다양한 국가의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참여한다”며 “그 모습을 보면서 이곳이 세계 영화제의 축소판이구나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일본에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하는 이곳에 세계 영화가 다 모여있다는 게 정말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높이 평가했다.
개막식에서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수상을 축하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상 메시지가 공개돼 이목을 끌기도 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너무너무 감격했다”고 말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 있는 친구 중 한 명 같은 느낌이었는데 너무 유명해지고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손이 닿지 않는 구름 위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며 “그런데 어제 영상을 보면서 아직 나를 친구로 생각해 주고 있구나 생각이 들어 굉장히 기뻤다”며 웃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번 영화제에서 갈라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뱀의 길’과 ‘클라우드’ 2편의 신작도 선보인다. 이에 대해 그는 “영화제에서 신작 2편이 상영되는 것도 처음이라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 같다”고 감격스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이어 “올해로 69세가 됐는데 한해 2편을 촬영하는 69세 감독이 있을까 생각하면 없을 것 같다”면서 “나는 조금 다른 감독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뱀의 길’은 1998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영화를 각색,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촬영한 영화로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은 동일하지만 컬트 클래식 야쿠자 장르였던 원작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5년 전 프랑스 프로덕션에서 다시 찍고 싶은 작품을 물었고 주저하지 않고 ‘뱀의 길’이 떠올랐다”고 영화의 출발을 밝혔다. 이어 “원작이 잘 쓰인 각본이었고 개성이 있었다. 그래서 감독의 작품이라기보다 작가의 성향이 굉장히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유독 나의 작품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다시 내 작품으로 변화시켜야겠다는 욕망이 작동했다”고 자신의 영화를 리메이크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클라우드’는 악의, 폭력, 집단광기의 연쇄를 구현한 영화다. 익명성에 묻힌 증오는 곯아 터져 결국 집단의 광기로 분출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린다. 스다 마사키의 입체적인 연기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본격적인 액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기존과 다른 영화를 찍고 싶었다”며 “평소 폭력과 가까운 사람들의 액션 영화가 많았는데 일상에서 전혀 폭력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임을 당하는 극한적인 이야기를 펼쳐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어떤 작품이든 ‘현실성’를 가장 중요시 생각한다고 했다. 감독은 “모든 영화의 첫 시작은 ‘리얼리즘’”이라며 “현실은 이럴 것이라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건 어려운 작업이다. 거기에 약간의 비약적인 전개를 가미하고 최종적으로는 영화로만 그릴 수 있는 순간을 넣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는 “베테랑이라는 이야기를 듣지만 영화 한 편을 끝나고 나면 ‘다음엔 어떤 영화를 찍지’라고 고민할 정도로 스타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며 “어떨 때는 나는 이상한 감독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여러분과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그러면서 “여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고 싶고 접근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며 “영화를 정말 좋아해서 이 작업을 시작했고 산처럼 많은 작품을 봤다. 그런 작품들에 비해 나는 열심히 해도 못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다. 일직선, 한 방향, 한 장르로만 직진하는 것은 상상하지 않고 있다”며 진심을 내비치며 더 다채롭게 채워질 감독의 영화 인생을 기대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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