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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어른

엘르 조회수  

제가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어떤 호칭이 편하신가요
‘수정아’라고 불러도 되고 선배라고 불러도 좋고, 다 괜찮습니다.

오늘 너무 멋지세요. 과감한 스타일을 시도해 본 느낌이 어떠세요
저는 제 모습을 안 봤어요. 스스로 놀랄까 봐(웃음). 근데 촬영 과정은 엄청 재미있었어요. 창작하시는 분들 에너지가 너무 좋아서 100 % 믿고 재밌게 했습니다. 그런데 기사 제목만 좀 바꿔주시면 좋겠어요.

제목이 정해졌나요? 뭐라고 들으셨어요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 이런 표현이더라고요. 나한테는 부담스러웠어요. ‘진정한’ 단어를 붙이는 순간 가짜 같아져서요.

아마 가제일 거예요. 어떻게 바꿀지 의논해 볼게요. 오늘 화보 스태프를 언급하신 것처럼 연기하실 작품 선택에도 누구랑 작업하는지가 중요하죠
굉장히 중요하죠. 꽉 막힌 사람이랑 하면 안 돼요. 이렇게 서로의 다름, 서로의 차이를 오히려 재미있게 받아들이는 팀하고 일하면 재밌어요.

톱은 Hankim.

톱은 Hankim.

선생님이 가진 차이도 재밌게 받아들여주나요
그렇죠. 처음엔 다들 스트레스를 좀 받는데, 조금 지나면 ‘저분은 원래 저러시구나’ 하고 편안히 받아들여줘서 좋아요.

연극과 영화, 드라마를 오가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세요. 장르별로 작업하시면서 느끼는 특이점과 재미는 어떻게 다른가요
드라마는 단거리 달리기 같아요. 장면을 컷마다 끊어서 작업해야 하니까 짧게 집중하고 대신 쉬는 시간이 많아서 편안하죠. 영화는 전체 분량 중에 제가 들어갔다 나오면서 더하는 기능, 무게감, 색깔 같은 걸 염두에 둬야 해요. 완성도로 볼 때 좀 더 재미있죠. 그리고 영화 찍는 배경이 훨씬 진해요. 그 배경 자체가 배우에게 주는 공기 압력이 다른 것 같아요. 연극은 두 달의 연습 과정 자체가 배우한테는 마음껏 출렁일 수 있는 무한한 자유의 공간이어서 말할 수 없이 재미있고요. 날마다 변화 속에서 두 달을 보내다가 결국 완성에 가까운 큰 변화는 관객을 만났을 때 와요. 객석을 꽉 채운 관객에게서 오는 기류를 배우의 몸 안에 받아들여 작동하면서 완성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연극의 세 요소에 관객이 들어가나 봐요. 아시겠죠? 관객 여러분, 여러분의 힘이 큽니다.

그 관객이 되어서 힘을 보태고 싶었는데 이미 매진이더라고요. 새 연극 작품 〈고트〉 표를 못 구해서 아쉽습니다
내년에 보세요(웃음).

배우는 자기 몸이 도구잖아요. 선생님께서는 좋은 신체와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시는 부분이 있나요
좋은 작품을 만나면 신경 안 써도 저절로 건강이 채워져요. 그 작품이 갖고 있는 에너지가 저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 때문이죠. 근데 좋은 작품인 줄 알았더니 ‘어, 뭐 밟았다!’ 이럴 경우도 있는데…(웃음), 흙 속에 진주가 묻힌 경우도 있으니까 잘 찾아봐야죠.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평상시 생활 리듬이 도움 돼요. 해 뜨면 움직이고 해 지면 쉬죠. 설혹 내일 안 일어난다, 아니 못 일어난다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도 하세요? 내일 내가 못 일어날 수도 있다는
그럼요. 제 연령에는 그럴 수 있죠. 만일 못 일어나면 그건 안식이라는 생각이 있어요. 이제 피곤한 일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구나.

만약 내일 못 일어난다면 오늘 뭘 하면서 하루를 보내시겠어요
별거 없어요. 똑같을 거예요. 내일 못 일어나는 건 삶의 목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고, 그냥 오늘을 사는 게 나의 진행형이니까요.

오래 커리어를 쌓으셨고 또 점점 영역을 확장하고 계신 점이 부러워요
진짜요? 난 쉬면서 우아하게 사는 내 친구들이 부럽던데요. 아니, 반농담이에요.

‘이 나이까지만 일하고 쉬어야지’ 이런 생각도 하시나요
나이를 정해놓은 건 아니지만 제가 생각할 때의 기준은 있어요. ‘이제 여기까지 하고 다른 삶을 살아야지’라는 소망은 있습니다. 질문하실 거죠? 어떤 삶을 살 거냐고? 그건 비밀이에요(웃음). 그때 가서 보세요.

배우 생활 가운데 잘 안 풀린다 싶은 시기도 있으셨을 거예요. 돌아보면 그때의 자신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쉬운 안 풀리는 거’는 그냥 늘 삶과 함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큰 침체기를 말한다면, 그럴 때는 그냥 이렇게 내려가서 가라앉는 그 무게를 온전히 느껴요. 하루 24시간이 이렇게 빼곡하게 흘러가네 하면서 하늘빛을 바라보고, 몸으로 쭉 내려가는 무게감을 느끼다 보면 만나게 되는 어떤 새소리, 음악, 글귀 하나…. 뭔가가 저를 침투하고 들어와요. 그런 시간이 저를 통과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부력을 받고 일어났던 것 같아요.

도인 같으시네요
평범한 사람이라서 이래요. 나한테 닥친 일을 무슨 굉장히 심각한 걸로 인식하기보다 그냥 받아들이거든요. 출산할 때도 병원에서 “너무 아프면 이 버튼 누르세요” 하는데 ‘어, 아기 낳는 게 다들 아프다던데 원래 이 정도는 아픈 거 아니야?’ 하면서 가만히 있었거든요. 그런 자세가 인생에 도움을 주나 봐요.

각도에 따라 입체적 연출이 가능한 렌티큘러 톱과 스커트는 모두 Hankim. 청키한 힐 부츠는 Zara.

각도에 따라 입체적 연출이 가능한 렌티큘러 톱과 스커트는 모두 Hankim. 청키한 힐 부츠는 Zara.

저는 선생님이 예민하고 뾰족하실 줄 알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좀 무디신 것도 같아요
그럼요. 무디지 않으면 어떻게 연극배우가 됐겠어요? 그냥 이건 이렇게 하는 거니까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두 달이나 연습할 수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데 작품 하나 좋다고 매번 가서 작은 변화의 기쁨을 느끼는 그거 하나로 감사해하잖아요. 그런 어떤 미련함, 좋게 말하면 덤덤함이 이래봬도 저에게 있답니다. 분장 선생님, 맞죠? 나 덤덤하게 100% 다 맡겼잖아요(웃음).

대화를 나눠보니 장난기가 많으신 것 같아요. 예측 가능한 답변보다는 조금 비틀어서 답하는 걸 즐기시는 인상도 받았어요
그렇죠, 그래서 내가 욕도 먹어요. 좀 철없어 보이죠?

아뇨, 그런 면이 선생님에게서 느껴지는 젊음의 요소인 것 같아요. 주름 없이 매끈하고 팽팽한 피부가 아니라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빛, 장난기나 정의감 같은 거요. 예수정이라는 배우는 언젠가 우리 앞에 ‘뿅’ 하고 나타났는데 전에 못 보던 유형의 새로운 어른 같아요. 그래서 젊은 여성들이 특히 좋아하나 봐요
안 봤으니까 못 봤겠죠(웃음). 근데 그 말이 저한테 큰 용기를 주네요.

저희도 선생님 같은 분을 보면 용기를 얻어요. 한국 사회에서는 똑같이 정해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나이 먹는 게 표준인 것처럼 제시되고, 특히 여성들을 죄는 압박감이 있잖아요.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이런 모습도 멋져’ 하는 다양한 예가 더 보이면 숨통이 트여요
그럼요, 꼭 동그란 돌만 될 필요는 없어요. 조금 찌그러진 돌도 괜찮은 거죠.

은발이 예수정의 시그너처 스타일이잖아요. 고수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이제는 그렇게 됐죠. 처음에는 엄청난 투쟁 기간을 가졌어요. 특히 드라마 같은 걸 할 때마다 고정관념에 부딪혀요. 분장팀에서는 흰머리를 두려워해서 물고 늘어지거든요. ‘아니 예순 살 먹은 내가 예순 살 역할을 하는데 머리가 왜 까매야 돼요? 지금 모든 어른이 다 흰머리를 염색하는데 그게 오히려 더 어색하잖아요? 염색은 허용되고 자연스럽게 하얀 건 안 되나요?’ 이런 식으로 싸우다가 말이 안 통하면 감독님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해요. 감독님이 막상 저를 보면 그냥 그대로 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해요.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어요.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을 통해 접하면 그 사람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데, 관념적으로는 경계심이 있는 것 같아요. 흰머리 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말이죠.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님도 자연스러운 은발의 모습으로 새로운 멋짐을 설득시킨 기억이 나네요
맞아요. 그분 역시도 고맙더라고요. 나같이 미미한 존재보다 더 힘이 있죠. 그런데 사람들 선입견이 강한 것 같아도 보니까 생각이 바뀌는 건 금방이에요. 한두 번 익숙해지면 ‘뭐 별로 이상하지 않네’ 이렇게 돼요.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위해 염색을 까맣게 해야 되나 하는 갈등은 없으셨어요
그런 갈등은 없고요. 오히려 어떤 독특한 역할을 맡게 될 때는 여기에다 제가 약간 컬러를 넣어요. 그 캐릭터에 맞게 약간의 살굿빛이라든가 잿빛을 브리지처럼 살짝 넣어보는 거예요. 어차피 예술은 디자인이니까.

캐릭터에 대한 배우의 해석을 헤어 컬러로 부여하시는 거네요
그렇죠. 또 만약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고 싶은 배역이 반드시 까만 머리여야 한다면 그땐 까만 걸 해도 되죠. 배우는 작품에 의해 설득당하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어떤 감독이 내 머리색 때문에 캐스팅을 안 하신다면? 그건 이미 저랑 안 맞는 거예요. ‘이 배역은 쉰다섯 살 역할인데 저 배우는 하얀 머리라서 캐스팅 못 해’ 이런 생각이라면 저는 그 작품 안 해도 돼요. 벌써 감독의 시각이 좁다고 느껴지잖아요. 머리색에 나이가 정해져 있습니까? 열아홉 살짜리가 하얀색 머리, 남자가 초록색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게 지금 사회에 하나도 안 이상하잖아요. 그런 제한 없이 배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연출가라면 저랑 만났을 때 헤어 컬러가 문제는 아닐 거예요. 머리를 다 뽑으라면 뽑을 것이고 삭발을 하라면 삭발할 거예요. 나는 준비돼 있어요.

굉장히 자신감 있어 보여요. ‘나는 좀 다르고, 내 방식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선생님의 태도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30대에 독일 유학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한국 사회를 떠나서 지내본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이 있었나요
나에게 어떤 ‘필’이 왔을 때 그것을 해버리는 건 독일하고는 상관없는 것 같아요. 오히려 독일에서 영향을 받은 건 그들의 소박한 삶이에요.

제 친구도 독일에 살고 있어요. 거기서는 아이들에게 물려받은 옷을 입히고 오래된 물건으로 육아하는 게 기본이라 새것투성이의 서울에 돌아오면 자기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꾀죄죄해 보인다고 하더라고요
‘꾀죄죄’가 아니에요. 자연스러운 거죠. 그런 데서 인류애가 느껴지지 않아요? 우리도 자연의 일부잖아요. 가구도 새것은 냄새가 심한데 오래 사용한 것은 푸근해요. 독일에서 놀라웠던 점은 새로운 무엇에 대한 탐함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저 더 건전한 사회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행복한 삶에 대한 탐함이 있는 걸 봤죠. 그리고 친자연주의적인 삶. 그런 경험이 저한테 도움이 됐어요.

지금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간다운 삶’을 ‘탐한다’니 이 두 개념이 결합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해봤어요. 물질적 탐욕만 자주 접해서 그런가 봐요
소박한 파티장에 모여 각자 집에서 만들어온 음식을 나눠 먹고, 이문재 시인의 시도 읽고, 시에 대한 이야기를 새벽까지 나누고, 그 뒤에서는 아이들이 단순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그런 데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느꼈어요. 연극 공부하러 갔는데 삶을 배우고 왔죠.

1990년대에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런 삶을 실천하면서 지내셨나요
그럼요. 당시에는 고발을 많이 하러 다녔어요. 왜 이렇게 하는지 의문스러운 게 너무 많더라고요. ‘유치원생이 왜 교복을 입고 다 똑같은 가방을 들어야 하나요?’ ‘초등학교 교실마다 왜 텔레비전이 필요해요?’ 이런 질문을 하고 다녔더니 우리 애들이 “엄마, 제발 학교 좀 오지 마”라고 했어요(웃음). 아파트에서는 분리수거를 건의하다가 설득해도 안 바뀌니까 반장을 맡게 되고요. ‘얘, 너네 반에 예솔이라는 애 있니? 걔네 엄마 좀 이상하다.’ 이런 소리를 맨날 들었죠.

블랙 톱은 Hankim.

블랙 톱은 Hankim.

저희가 작품으로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재야의 실천가로 살고 계셨네요
유학 마치고 돌아오니까 내가 지금 연극할 때가 아니다 싶더라고요. 삶이 우선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연극반 교사도 하고, 아이들과 함께 공연도 다니고…. 그러다가 어떤 사건이 있었어요. 남편이 이러더군요. “당신 혼자 세상을 일일이 다 교정할 수는 없어. 이제 당신이 속한 곳으로 가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그래서 다시 연극 무대로 갔죠.

그런 생각들이 지금 하시는 활동에도 반영되는 것 같아요. 2022년 〈멧돼지 사냥〉으로 MBC 연기대상 조연상을 받았을 때 한나 아렌트의 ‘악의 진부함’ 개념을 언급하신 수상 소감도 인상적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용기를 주네요. 난 주눅 들어 있었어요. 좋은 자리에 와서 그딴 소리를 하냐고 아는 사람한테 야단맞았거든요. 그때 MBC의 용기에 대해 고마워서 표현하고 싶었어요. 분명히 많은 사람이 안 볼 텐데도 그런 작품을 선택한다는 게.

선생님이 배우로 활동하면서 사용하는 예수정이라는 이름의 성은 어머니(배우 정애란, 본명 예대임) 성함에서 따오셨잖아요. 따님의 성함에도 ‘예’ 자가 들어가더라고요(연극 연출가 김예나). 모녀 3대가 예술의 ‘예’ 자를 공유한다는 게 흥미로워요. 어머님이나 따님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이름이라면 선생님이 활동명의 성을 선택하면서 가운데를 이어 모계 라인이 완성되었다는 점도요
아니, 지금 작가님의 선택으로 그렇게 줄이 이어졌어요. 난 그건 생각 못 했네요. 딸 이름을 지을 때 간단하게 ‘아빠 성의 김, 엄마 성의 예, 나 할 때 나, 그래서 너는 김예나다’ 이랬어요(웃음).

연극이라는 공통점도 가진 모녀 3대인데요, 어머니에게서 본인을 거쳐 딸에게로 이어지는 공통적인 기질 같은 걸 발견하시나요
‘세 명 다 쉽지 않은 인물이다’ 그거 하나네요. 우리는 동지 같아요. 작품을 하다 보면 외로울 때가 많아요. 우리가 쉽지 않은 인물들이라서. 그럴 때 서로 이해해 주는 동지가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돼요. 우리는 자주 만나지 않아요. 전화하는 것도 서로 싫어하고요.

신기하네요. 보통 엄마들은 엄청 서운해하잖아요. 자식이 먼저 연락 안 한다, 챙기지 않는다고
연락 안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친구들이랑 친하고, 즐겁게 놀고, 자기 작품 하느라 정신없고, 그래서 엄마를 잊어버려야 내가 행복하죠. 내 생각은 그래요. 나도 우리 엄마를 꼭 필요할 때만 찾았으니까.

그럼 지금 따님은 어떤 상황에서 엄마를 찾나요
작업하다 부당한 상황을 만났을 때? 가만히 듣다가 제가 얘기해요. “그러면 그거 빼버려. 중단해. 하지 마. 의미 없다.” 제가 이렇게 관두라고 나오면 자기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좀 더 참아야 되겠다 하면서 열심히 하죠. “얘, 어쩌겠니, 참아.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이런 소리는 먼저 안 해요. 아마 드물겠지만 이렇게 서로 위로가 되겠죠.

선생님 필모그래피에서 영화 〈69세〉의 심효정 캐릭터를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 촬영 시점에서 몇 년이 흘러 지금의 나이가 작품과 포개지게 되었어요. 69세라는 나이는 실제 살아보니 어떤가요
우리같이 철없는 사람들은 자기 나이를 잊고 살아요. 다만 〈69세〉를 찍을 당시에는 아직 69세가 안 됐을 때였고, 임선애 감독과도 얘기를 나눴어요. 현실의 그 나이가 어떻다는 리얼리티보다는 개념적으로 접근해 보자고. 그런데 다들 그렇게 자기 나이를 생각하면서 살아요? 69세라는 감각은 73세랑 많이 다른가? 그냥 나한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바깥에서 몇 살이라는 딱지가 붙어요. 먼 우주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일 뿐이에요.

살아오며 여러 가지 변화를 보셨잖아요. 세상은 나아지고 있을까요, 점점 나빠질까요
미래는 예측하는 게 아니에요. 물론 상식 이하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죠. 특히 대한민국에서 합리적이지 않은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요. 좁은 시각으로만 보면 ‘세상은 망해도 싸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하지만 인류 역사 속에서 이보다 더한 시기도 많았어요. 질병이 유행해서 수십만 명이 죽어나가거나 종교 교리로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던 시대도 있었으니까요. 미래는 오직 인간의 능력과 의지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지 몰라요. 오히려 우리 같은 작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커다란 흐름 속에 느닷없이 이쪽저쪽 방향을 바꾸며 문제가 해결되어온 것에 가깝죠. 이 큰 흐름 속에서 보면 굳이 낙담할 필요는 없어요. 다만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죠. 세상의 시스템에 의문을 던지고, 손을 들고,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고…. 이런 건 시민으로서 날마다 수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하시는 운동이 있나요
지금은 산책 정도 해요. 전에는 스케이트를 많이 탔어요. 선수들 따라 코너링도 하고, 다리가 튼튼해져서 그걸 좀 오랫동안 써먹었죠. 스키도 많이 탔었고.

흰색 플리츠 톱은 Le Vermilon.

흰색 플리츠 톱은 Le Vermilon.

일부러 배우신 건가요
네, 그럼요. 스케이팅은 안 배우면 못해요. 원래 좋아했는데 우리 애 가르치면서 같이 배웠어요. 애를 유치원에 보냈는데 어느 날 가보니까 ‘이랬어요, 저랬어요’ 이런 자연스럽지 않은 말투를 배우고 있더라고요. “야, 내일부터 유치원 가지 마. 엄마랑 스케이트장 가자.” 그래서 아이와 같이 겨울만 되면 태릉 빙상장에서, 여름에는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살았죠. 우리는 그렇게 쌓은 체력이 확실히 있어요.

〈겨울왕국〉을 연상시키는 선생님 헤어스타일이랑 스피드 스케이팅이 잘 어울리네요. 지금은 완전히 그만두셨나요
나이 들면서 그만뒀어요. 스케이트는 잘 넘어져야 되거든요. 그런데 안 넘어지려고 애쓰다 보면 뼈가 부러져요. 이제는 넘어졌다가 뼈라도 부러지면 큰일 나니까 그만하자 했죠.

요즘도 새로 배우거나 관심 가지신 분야가 있나요
새삼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된 분야는 철학이에요. 전에는 문학을 더 좋아했는데, 어떤 경계를 설명해 주는 게 철학 같아요. 시대와 사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유도해 줘서 좋아요. 그런데 왜 진작 철학 공부를 안 했을까? 맨날 이번 공연 끝내놓고 더 공부해야지 하는데, 한 페이지 읽는 데도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 거야(웃음)?

작품을 하시면서 젊은 세대와도 소통할 일이 많으실 거예요. 그들을 보면서 참 다르구나 하고 느껴지는 점은 뭔가요
작품을 같이 하는 젊은이들한테서는 그런 걸 느끼기 힘들어요. 서로 본체보다는 작품 속 캐릭터로 만나니까. 그런데 작품 밖에서 젊은이들을 만날 때는 우리 때보다 훨씬 다양한 쪽으로 탐구하는 모습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도전하는 모습이 좋아요. 우리 어른들한테 귀감이 됩니다.

잘 나이 먹기를 원하는 〈엘르〉 독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나이가 들었다는 걸 여러 모로 느껴요. 돋보기를 써야 글을 읽고, 스케이트 타던 걸 못 타게 되고, 음식 잘못 먹으면 알러지가 확 올라오는 그런 물리적 불편함은 당연해요. 그런데 4살이든 21살이든 52살이든 80살이든 한 생명의 에이징 과정이라는 것은 다 똑같다고 봐요. 밥이 잘 되려면 뜸이 들어야 하잖아요? 자꾸만 조급해져서 솥 뚜껑 열다가 생쌀 만나지 마시고 밥은 잘 에이징 되게 놔두세요. 맛있어지려니 하며 그 시간에 즐거운 일 하시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시작할 때 ‘진정한 어른’이라는 제목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선생님 앞에 OOO 어른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붙는다면 뭐가 어울릴까요
동시대. 그냥 동시대 어른. 내 나이가 있으니 어른은 어른이고 동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이렇게 넓혀 놓으면 보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좀 편안하겠네요.

엘르
content@www.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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