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가 소설을 연재합니다. 작가의 단편소설을 매일 오전 업로드합니다. 독자님들께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단편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처음 소개하는 작품은 정찬주 작가의 ‘그림자와 칼’입니다. 소설은 어느 날 사람들의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충격적인 상상으로부터 시작됩니다.[편집자]
남무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패도공이 준 반야도를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의 속옷과 세면도구가 들어 있는 여행용 가방 속에는 왠지 넣고 싶지 않았다.
거리는 여전히 지독한 불별이었다. 가옥들이 물속에 가라앉은 빨랫비누처럼 부풀어 보였다. 전신주들이 휘어진 채로 스쳐 갔다. 남무는 반야도의 무게를 감지하면서 문득문득 희열을 받았다. 반야도는 바지 주머니 속에서 제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반야도의 촉감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것은 남무더러 어서 이 도회지를 떠나리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남무는 반야도의 깊은 뜻을 아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는 낡은 연립주택이 보일 때까지도 그랬다.
반야도의 위력이라고 믿어도 좋을까. 남무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도 결코 당황하지 않을 듯싶었다. 당황은커녕 오히려 남무가 더 적극적일지도 몰랐다.
남무는 그녀가 사는 〈나〉동으로 곧장 가지 않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았던 벤치로 먼저 갔다. 남루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맛있게 빨아 삼켰다. 그녀와 더불어 맡았던 아카시아 꽃향기가 어디선가 다시 몰려오는 것 같았다. 남무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또다시 점검했다. 준비는 완벽하리만큼 철저했다. 미비한 점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나〉동의 건물은 물론, 그쪽으로 난 길까지도 남무의 눈에는 오수에 잠겨 있는 무우산 속 어느 곳의 풍경처럼 비쳤다. 남무는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더욱 경건하게 한 계단 한 계단 층계를 올라갔다. 충계를 밟을 때마다 머릿속이 투명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우산을 오르고 있는 것 같아.”
그처럼 상쾌한 기분이라면 차라리 그녀의 철문 앞에서조차 멈추지 않고 계속 걷고 싶었다. 이윽고 남무는 벨의 단추를 확실하게 두 번이나 눌렀다. 그리고는 한걸음 물러서 기다렸다.
낮잠을 자고 있을 리는 없었다. 남무는 다시 한번 더 벨을 누르고서, 이번에는 자신의 귀를 문에다 붙였다. 그래도 기척은 없었다. 외출을 한지도 몰랐다. 다시 또 벨을 짧게 두 번, 세 번은 길게 눌렀지만 기척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이 남무는 철문에다 두 귀를 번갈아 가며 붙였다. 암담하게도 라디오가 보내주던 암호소리마저 들려오지 않았다. 철문의 차가운 금속성만이 귓바퀴에 전해졌다.
남무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현기증이 불쑥 되살아났다. 혹시 그녀가 먼저 무우산으로 떠나버린 건 아닐까. 나를 위해서, 아니 이 도회지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니야,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그러나 남무는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그녀에게 늘 무우산 얘기를 마음속으로 들려주었던 것이다. 기도하듯 마음속으로. 이런 경우를 이심전심이라고 하는 것인지…
남무는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딛을 때마다 바지 주머니 속의 반야도가 자꾸만 발기불등이던 남근을 건드렸다.
건물을 빠져나온 남무는 그녀와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남무는 몇 걸음 못 가서 멈추었다. 갑자기 커져 버린 남근이 성을 내고 있었다. 그림자 없는 자신의 발목이 견디지 못할 만큼 외롭게 보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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