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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의 그림이 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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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리던 걸 멈추고 ‘내 새끼 왔는가’ 하며 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CHUN KYUNG JA – SUMITA KIM
‘누가 울어’(1988)는 어머니 그림의 응축된 에너지가 절정을 이루던 1970~1980년대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모델이었던 나와 서교동 시절에 기르던 꽃순이와 진진이가 등장하고, 식구들이 그림 제목 후보들을 놓고 투표했던 추억이 서려 있다. 어머니가 처음 화실을 갖게 된 것은 1962년 가족이 옥인동 국민주택으로 이사 간 후였다. 어머니는 2층 다다미방 하나를 화실로 썼는데, 초등학생인 내가 “엄마 있어?” 하며 대문을 열고 앵두나무가 있던 마당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면 엄마는 바닥에 엎드려 무릎을 꾼 자세로 그림 그리던 걸 멈추고 “내 새끼 왔는가” 하며 팔을 벌려 안아주곤 했다. 밖에서 묻혀온 바람 냄새를 맡으며 볼을 부비고 “푸푸 뿌뿌야, 삐리삐리 삐리야” 같은 뜻 없는 소리로 장단 맞추며.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한 중년 이후 어머니는 해외 스케치 여행을 다니셨다.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오지에 가도 화판만 끼고 있으면 겁나지 않았고, 현지인과 풍물을 스케치하기 시작할 때면 모든 불안감이 사라지고 푸근한 안도감이 퍼져왔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그림은 종교였다. 채색화가 푸대접을 받을 때도 그것으로 독보적 화풍을 이룩한 것이나 1960년대부터 전 세계 스케치 여행을 다닐 만큼 모험심 가득하고 선구적인 여자. 나는 워싱턴에서 어머니의 화업을 기리는 천경자재단을 발족시켰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첫 사업으로 ‘Chun Kyung-Ja 예술상’을 제정했고, 올해 말 처음으로 시상식이 열린다. 화풍과 재료를 떠나 천경자 창작 정신의 근본인 독립성과 용기, 진정성을 계승하는 작품으로 꾸리겠다.

“자야, 아버지 참 애교스러우시지. 그림에도 그런 데가 있어.”

YOO YOUNG KUK – YOO JA YA
1977년, 파리에서 텍스타일을 공부하다가 학위를 따는 대신 서울에 와서 취직하려던 시기.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아버지는 2차 심장박동기 수술을 했다. 그때 집도의가 박동기 코드를 연결하는 걸 깜박한 나머지 재수술을 받았고, 거의 두 달 반 동안 중환자실에서 위기를 보냈다. 가까스로 8월 말에 퇴원한 아버지를 두고 나는 결국 파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해 가을, 어머니와 부석사에 간 아버지는 그곳 사과나무에 석양이 깃들어 빨갛게 불타오르는 장면을 그렸다. 그 그림이 ‘사과 나무’(1977)다. 어머니는 그림 가운데 오렌지색과 빨간색을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자야, 아버지 참 애교스러우시지. 말이 없고 무뚝뚝하셔도 그림을 보면 그런 데가 있어.” 이 그림은 부모님 침실에 아주 오래 걸려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작업하고, 식사 시간도 정해서 드셨다. 점심 식사 후 30분 정도 쉬고는 규칙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매일 똑같이 하는 것, 전업 작가로 사는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버지는 성실함의 예술가다. 매일 언제나 똑같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하게, 평생을.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냉철하고 예리한 통찰력과 차분하게 밀고 나가는 의지가 누구보다 투철한 존재, 그 자체였다.

“그는 작업할 때 움직이거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KIM TSCHANG YEUL – KIM OAN
‘3부연작’(1987)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버지의 그림이다. 가을 정취가 제대로 느껴진다. 마치 수수께끼나 상징을 해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비롭고 고요하며 단순하다. 각 캔버스는 각각 다른 장르의 그림으로도 감상할 수 있다. 하나는 비밀 같은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적인 그림이며, 오른쪽 그림은 개념적이다. 물방울은 시간이 지나면서 캔버스에 흡수돼 얼룩이 되고, 얼룩은 결국 사라져 빈 캔버스만 남게 된다. 시간, 삶과 죽음, 공허함과 충만함의 은유로서 말이다. 아버지는 농부가 촉촉한 밭을 일구는 것처럼 작업실에서 일했다. 차분하고, 일관성 있고, 진지했으며, 물방울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작업했다. 작업할 때 음악이나 라디오를 듣지 않았고, 조수들과 수다를 떨지 않았으며, 움직이거나 꿈틀거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작업에 대해 많이 말하지도 않았다. 이런 단순한 방식으로 아버지는 매우 단순하고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다층적이고 깊은 예술을 창조했다. 삶의 모든 순간을 품위 있게 살았다. 어떤 것에도 과하게 빠지지 않았으며(가끔 친구들과 술 마시는 것만 제외하고!), 그가 한 모든 몸짓은 의도적이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등을 곧게 펴거나, 신문을 호기심과 무관심을 동시에 지닌 태도로 읽거나, 어린 아들이 나를 자극할 때마다 길고 차분하게 숨을 내쉬는 지금처럼.

“창작의 기운이 응축되고 충만해졌을 때 비로소 화실에서 전광석화처럼 그림을 그려내셨다.”

SUH SE OK – SUH DO HO
아버지는 독서광이셨다. 주로 한문책을 읽으셨는데 기가 막히는 건 읽은 책의 문장을 모두 기억하고 암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을 인용하는 능력도 만만치 않았다. 언젠가 그 비결을 여쭤봤더니,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됐다고 하셨을 뿐. 그러니 내가 지금 그리운 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잠자리에 들기 전 3~4시간 동안 책을 독송하던 모습과 그 목소리다. 청정하고 숭고한 경지에 오른 선승의 독경이나 명창이 불러내는 한 편의 판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집 안 가득한 아버지의 독송 소리를 배경으로 공부했던 것이 매일 반복된 아버지와의 일상이었다. 아버지는 한학에 정통했고 시서화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우리 시대 마지막 문인화가이자 동시대성을 확보한 최초의 현대 한국화가다. 화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화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와 사색, 집필 그리고 산책과 정원의 나무들을 돌보는 데 썼고, 그 결과 창작의 기운이 응축되고 충만해졌을 때 비로소 화실에서 전광석화처럼 그림을 그려내셨다. 당신이 가진 지식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의 정도와 격은 나 같은 범인이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다. 아버지의 말년에 여쭤봤다. 더 늦기 전에 어려운 한문으로 쓴 당신의 철학과 화론, 시들을 후학을 위해 한글로 출판하는 건 어떤지. 그것을 찾아 공부하는 것은 후학들의 몫이라는 답변을 들으며 초월자의 모습을 훔쳐본 느낌을 받았다. 요즘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떠올린다.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다시 해석해 본, 내가 좋아하는 ‘즐거운 비’(1976)를 유독 가까이서 바라보며.

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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