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이 돌아왔다. 데뷔 이후 보컬리스트로서 자신의 위치와 세계를 끝없이 확장해 온 백현은 솔로 아티스트로서도 유례없는 행보를 써내려가는 중이다. 3년 6개월 만에 선 보이는 4번째 솔로 앨범 〈Hello, World〉 발매를 앞둔 시점 백현이 대중음악 평론가 김윤하와 음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9월 6일 발매된 앨범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군 복무라는 사정이 있었지만, 이전 앨범 발매 간격을 생각하면 꽤 오랜만의 복귀인데요. 그래서인지 제목인 〈Hello, World〉가 반가운 인사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다시 데뷔하는 느낌이 들어요. 일종의 생존 신고 같은 앨범이기도 하고요. 앨범명 〈Hello, World〉는 마음먹고 하는 새로운 인사이자, 한편으로는 세상을 대상으로 백현이라는 사람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다는 포부이기도 해요. 오랜 기간 준비하다 보니 앨범에 대한 판단력이 점점 흐려지는 듯한 순간도 가끔 있었지만요.
그런 순간에 만난 게 타이틀곡 ‘Pineapple slice’였군요
처음 시작되는 베이스 라인을 듣자마자 마음에 들었어요. 요즘은 노래도 점점 짧아지는 추세잖아요. 아무리 곡이 좋아도 듣는 사람을 순간적으로 사로잡아야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Pineapple slice’는 도입부부터 저를 사로잡았죠. 멜로디 진행도 좋았어요. 제가 얇거나 높은 소리보다 중음대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거든요. 제 목소리라는 악기가 들어갔을 때 조화로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더군요.
수록곡 여섯 곡 모두 많은 공을 기울인 게 느껴졌습니다
이전보다 한 발짝 나아간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진짜 고급스러움’이 한 방울 더해진 느낌(웃음)? 이게 구체적인 표현이라기보다 느낌적인 접근이다 보니 작업하는 분들과 온전히 공유하고 완성해 내기까지 쉽지 않았어요. 새로운 시도를 더 많이 선보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죠. 이번 앨범에서 처음으로 ‘싱잉랩’에 도전했거든요. 앞으로 해야 할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보컬리스트이자 그 이상의 것을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는 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다시 돌아와 익숙한 R&B를 택했습니다
R&B는 제가 음악을 하면서 쭉 끌고 갈 장르예요. R&B를 정말 좋아해요. 그 안에서 뭐든 놀고 싶어요. R&B가 폭이 정말 넓잖아요. 힙합이 될 수도 있고, 재즈가 될 수도 있고. R&B라는 장르에서 파생되어 나갈 수 있는 길 위에서 제가 가볼 수 있는 길을 어디든 쭉쭉 뻗어나가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번 앨범에서 가장 멀리 나가본 길은 어떤 곡일까요
싱잉랩을 처음 시도한 ‘Cold Heart’ 아닐까요? 곡 자체의 난이도보다 태어나서 처음 랩을 하려니 저만의 ‘랩 톤’을 찾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목이 평소 노래할 때 쓰는 호흡이나 기교에 익숙해 있어서 랩으로 멋스러움을 표현하는 톤을 잡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듣는 순간부터 도전해 보고 싶었고, 어려운 만큼 잘 만들면 공연에서 분위기를 전환시켜 주는, 적재적소에 쓰일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려움 반, 욕심 반으로 작업한 곡입니다.
반대로 백현이라는 보컬리스트의 목소리와 스킬이 가장 능숙하게 담긴 곡이 있다면요
‘Rendez-Vous’. 이 곡은 좀 연약한 느낌이에요. 건드리면 깨질 것 같고 그래서 보호해 주고 싶지만 그 안에 확실한 ‘뚝심’이 있어요. 겉보기엔 약해 보여도 눈빛이 살아 있다고 해야 할까요? 목소리를 높이지 않지만 자기확신이 있어 아우라가 느껴지는, 그런 사람 같은 노래예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능구렁이 보컬’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웃음).
노래 설명이 마치 눈앞에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노래할 때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요. 가사지에 호흡이나 리듬 같은 걸 빼곡히 쓰는 타입은 아니에요. 노래를 듣고 먼저 ‘내가 이 안에 들어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해요.
제가 2021년 발표한 ‘놀이공원’을 좋아하거든요. 그 곡은 어떤 그림 위에 탄생했나요
‘놀이공원’은 가사가 정말 디테일했어요. 준비된 밑그림 위에 속으로는 너무 떨리지만 연애 고수인 척하고 싶은, 좀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상상했죠(웃음). 덕분에 목소리도 되게 포근하고 달콤한 소리가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대신 ‘척’하고 싶어 하는 부분에서는 발음을 섹시하게 내보거나 진성으로 소리를 내봤거든요. 신기하게도 듣는 분들이 그런 디테일을 다 알아봐주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몇 번 하고 나니까 가수란 자기가 그린 그림으로 노래를 불러 완성하고 그걸 듣는 분에게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지금도 그렇게 믿고 계속 노래하고 있어요.
‘동물적으로’ 접근하는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런 면에서 학구적인 타입은 아니에요. 완전 본능에 충실하죠. 같이 작업하는 분들에게도 제가 떠올린 그림을 구체적으로 전하려는 편이고요. 예를 들어 ‘빗속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전 그 사람 포즈에서 눈빛이 이미 다 그려지거든요. ‘똑바로 서 있는 게 아니라 비스듬히 벽에 기댄 자세이고, 눈빛은 살짝 우수에 젖어 있고, 폭우가 아니라 추적추적 내리는 비야.’ 이런 식으로 묘사하면서 설명해요.
MBTI가 혹시
… ESTJ입니다.
팔자에 ‘N’이 없는데 상상력이 풍부하네요(웃음)
적어도 노래를 부를 때는 확실히 이미지나 상상에 기대는 게 편한 사람 같아요. 전 어릴 때부터 노래를 듣고 그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게 익숙했거든요. 제가 발라드를 진짜 좋아했어요. 발라드는 가사가 감성적이고 잘 들리잖아요. 가사를 내 상황에 빗대기도 하고 별의별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아요.
R&B는 언제부터 좋아하기 시작했나요
고등학교에서 실용음악을 준비하면서부터요.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어요. 박자부터 8분의 6박자이고, 정박에 노래하는 것도 힘든데 레이 백(Lay Back)도 틈틈이 넣어줘야 하니까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게임 같기도 하고. 곡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제 마음대로 노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장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R&B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
전 ‘UN village’를 발표하는 순간 ‘이건 됐다’고 생각했어요. 새롭게 받아들여주시는 분이 많아서 그것으로도 만족했던 것 같아요. 특히 그 이후 한국 R&B 작곡가들이 좋은 곡을 많이 보내주신 게 기뻤어요. 장르 음악가들이 저를 협업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니까요. 감사하게도 이번 앨범 작업 때도 마찬가지였죠.
맞아요. 이번 앨범에도 ‘Colde’나 ‘dress’ ‘JUNNY’ 같은 반가운 이름이 많더라고요. 2집〈Delight〉나 〈Bambi〉를 지금 돌아보면 어떤가요
〈Delight〉의 ‘Candy’는 작정하고 만든 ‘R&B K팝’이에요. 안무도 일부러 약간 튀는 어번 힙합을 재미있게 붙여봤고요. 〈Bambi〉는 제가 하고 싶고 또 할 수 있는 R&B를 제대로 보여주자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제일 하고 싶던 음악을 담은 앨범이에요.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그런 R&B, 소울, 올드 팝을 부르고 싶어요.
‘All I got’을 택한 이유가 바로 그거였어요! 이제 군대에 가면 최소 2년은 직접 목소리를 들려드릴 일이 없으니까 지금 최대치를 보여주자! 한편으로는 제 한계에 도전하면서 계속 성장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난이도가 높아서 아직도 컨디션 좋은 날에나 3절까지 만족스럽게 완창 가능한 곡입니다(웃음).
힘들다면서도 즐거워 보여요. 노래하는 걸 정말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죠. 재미있어요. 발성이라는 게 거울을 보고 연습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노래는 자신의 감에 기댈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그 감이 참 잡힐 듯 안 잡히거든요. 노래를 시작한 뒤로 지금도 하루에 한 번 이상 목 상태를 체크해요. 습관도 있지만, 어제 불렀던 걸 기억하면서 오늘도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있나 테스트해 보는 거죠. 만약 어제의 녹음이나 라이브가 마음에 들었다면 다시 그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성대랑 계속 밀고 당기기를 하는 거죠. 하루 24시간, 거의 모든 순간 성대를 의식하고 사는 것 같아요.
상상 이상으로 굉장히 치열한 매일이네요
저는 제 장점과 단점을 잘 알아요. 그래서 노래도 그렇고 20대 때는 스스로 과하게 몰아붙이는 성향이 있었어요. ‘그거 네 단점이야, 들키면 안 돼’ 하면서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나를 너무 못 챙겼구나’ 싶더라고요. 이제는 못하면 못하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게 오히려 더 큰 용기이고 멋이라고 생각해요. 못하면 노력하면 되고, 모르면 물어보고 알면 되잖아요. 그런 자세가 연차가 쌓여도 이 신에서 잘 융화돼 살 수 있는 힘이 될 거라고 믿어요. 저도 30대잖아요. 20대에 치열하게 살면서 저도 모르게 얻은 것을 이제야 조금씩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으면서 모든 면에서 더 겸손하고 성숙해지고 싶어요.
오랜만에 음악 방송도 찾을테고, 다양한 백현을 만날 수 있을 텐데요. 이번 활동을 통해 어떤 걸 남기고 싶나요
다가가기 편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팬들에게도 그렇고, 동료 가수들에게도요. 요즘 음악 방송 가면 챌린지 촬영이 많은데, 아무래도 제 대기실 방문을 두드릴 후배가 많지 않을 것 같으니 루미큐브라도 챙겨 가자는 농담을 스태프들과 나눴어요(웃음). 더 친근해지고 싶어요. ‘나 그냥 백현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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