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를 입천장에 살짝 닿는 정도로 말아 올리고, 목젖을 울린다는 생각으로 소리를 낸다. 아르르르흐. 어떤 언어에는 내가 낼 수 없는 소리가 있다. 건널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그저 바라보면 되니까 마음이란 게 더욱 깨끗해지는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제1언어로 습득한 작가 다와다 요코는 제2언어로 습득한 독일어를 포함해 두 가지 언어로 온갖 글을 쓴다. 시와 소설, 희곡 그리고 나머지 모든 말…. 그는 언어의 이중국적자다. 일본인인 동시에 일본인이 아니다. 하지만 독일어로 글을 쓴다고 해서 독일인일까?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일본인은 그렇지 않은 일본인과 어떻게 다를까? 독일어로 쓰인 작품과 일본어로 쓰인 작품은 어떻게 다를까? 다와다 요코는 어떤 언어에 자신의 본령이 있다고 생각할까? 그런 건 애초에 없다고 생각할까? 그래서 두 언어를 쓰는 것일까? 나는 거의 모든 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한 번 혹은 그 이상, 셀 수 없을 만큼 선적된 언어들. 저기서 태어나 이곳에서 정박하고, 머물다가 또 떠나고, 그 다음 정착지에서 또 한 번 더 정박. 멈출 때마다 다르게 되어야 하는 글자들. 그것을 이고 나르는, 옮기는, ‘글자를 옮기는 사람들’. 나는 본능적으로 이런 언어들에 끌린다. 원본을 알 수 없게끔 아마도 혹은 분명히 변형되었을 글. 그리고 그 사이를 횡단하는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미묘한 차이. 생김새. 나는 번역이 가진 그 단독의 행위성이 좋다.
얼마 전 한 프랑스 작가의 작품이 번역돼 국내에 출간됐다. 이전에 다른 책을 읽다가 포기한 경험이 있는 작가였다. 하지만 이번에 새롭게 번역된 책은 달랐다. 말 그대로 정말, 다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사람의 영역이란 게 참 사방으로 뻗어 있는 거였지 하면서 새삼 재밌게 읽었다. 돌아보니 내가 포기할 뻔했던, 그러나 그러기엔 너무 멋진 이야기들을 다시금 잡아 읽을 수 있게 된 데는 언제나 번역가의 존재가 있었다. 이후 거의 모든 책을 읽을 때마다 한 번쯤 멈춰 번역가의 이름을 확인한다. 그가 어떤 작품과 작가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어떤 다른 책을 번역했는지 훑어본다. 반갑다. 아는 이름이다. 어떨 땐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으려고 책의 끝으로 달려간다. 어쩐지 쓴 사람과 선적한 사람의 태가 조금 닮은 것 같다. 거의 항상 그렇다. 내가 모르는 언어와 우리가 아는 언어 사이를 횡단하며, 수만 개의 글자들을 선적했을, 배 안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들.
이번에는 책을 다 읽고 마침 개인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유일한 번역가이기도 한 그분께 문자를 드렸다. “선생님! 이번 신간 너무 좋아요! 번역 짱!!!”이라는 조금 퇴화된 언어로…. 1차원의 세계에 있는 순수한 기쁨을 전달했다. 곧바로 전화가 왔다. 선생님이었다.
우리는 통화했다. 서로를 궁금해하고, 독려해 주고, 칭찬해 주고, 서로의 바쁨을 긍정적으로 견제하고, 언제 한번 보자는 전형적인 K대화의 마무리로 끝나는 그런 내용의 통화였지만 나는 참 좋았다. 이것은 글이 아니었다면, 글을 옮기는 사람과 그렇게 옮겨진 글을 다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말을 다듬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대략 10포인트 정도 되는 줄글을 아직까지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조금 기뻐하면서 “선생님, 번역 많이 해주세요. 쉬지 마세요. 놀 생각 마세요!” 하면서 하하호호 웃었다. 상기된 목소리, 기쁨에 가득 찬 음성,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행복인 것 같았다.
‘나의 시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내 시집이 있구나, 그러면… 그러면 내 시집이, 나의 말들이 옮겨졌으면 좋겠다, 그 어느 곳이든 횡단하고 마음대로 선적되면 좋겠다, 라고 생각한다. 이 꿈같은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난 정확히 모르고 그나마도 시집은 아주 가끔이지만, 그래도 오늘도 수십 권의 번역서가 출간되긴 할 것이다. 그중 기대하는 것은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인 시인 캐시 박 홍의 시집이다. 마침 책 제목은 〈몸 번역하기 Translating Mo’um〉. 신체 수행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다루는 기구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글쓰기에는 언제나 행위성이 있다. 몸을 번역한다고. 그래, 그건 그냥 글을 쓰는 일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의 다른 몸이 되어 다른 삶을 살게 된 내 말들, 나의 시집. 그것을 지대로 삼아 나 역시도 횡단하는 사람이 돼보고 싶다. 글자를 옮기는 사람에게 글자를 주고 싶다. 나눠지고 싶다.
언어는 머무르지 않는다. 영원히 떠다닌다. 항해하고 선적된다. 여행하며 옮겨진다. 그리고 기꺼이 그것을 추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어를 횡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는 다른 말로는 절대 번역되지 않는 책도 있습니까?”
“네,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책이 그렇지요.”
“번역본밖에 남아 있지 않은 책도 있나요? 옛날 책.”
“네, 원본이 사라져서 번역본만 남아 있는 책도 있습니다.”
“번역본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원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건 누구나 바로 알 수 있어요. 번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언어와 같거든요. 뭔가 후두둑 돌멩이가 떨어지는 느낌이 드니까 알 수 있어요.”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유라주 옮김)에서 인용
박참새
」
대담집 〈출발선 뒤의 초조함〉 〈시인들〉을 펴냈다. 제42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며 첫 시집 〈정신머리〉를 출간했다. 글자에 가둬지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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