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명절이 참 좋았습니다. 명절에만 맛볼 수 있는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 어른들께서 주시는 용돈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무엇보다 명절이 좋았던 건 긴 연휴 동안 만홧가게에서 만화를 잔뜩 빌려 볼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방에서 뒹굴뒹굴하며 만화의 세계에 빠져들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이젠 동네에서 만홧가게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는 게 뭔가 좀 씁쓸하기도 하지만, 대신 우리에게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갈 수 있는 신대륙이 생겼습니다. 바로 웹툰인데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찾아갈 수 있는 만화의 신세계. 이번 추석 연휴에는 어떤 판타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볼까요? 꽉 막힌 귀성·귀경길의 지루함을 달래줄 ‘찐친’이 될 것입니다.
역대급 영지 설계사
국내 웹툰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설정이 두가지 있습니다. 주인공이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타임슬립(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과 현실과 전혀 다른 일명 ‘이세계’로 넘어가 모험을 펼치는 것인데요. 네이버웹툰 ‘역대급 영지 설계사’(김현수, 문백경, 이현민)의 주인공 김수호는 갑자기 자신이 읽던 소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빙의한 대상이 주인공도 아니고, 모든 이들이 싫어하는 소설 속 역대급 개망나니 캐릭터인 ‘로이드 프론테라’라니. 하지만 로이드 프론테라가 된 김수호는 끈질긴 생명력과 자신의 전공인 토목·건축 지식을 활용해 빚에 시달리던 프론테라 가문과 주변 사람들, 나아가 소설 속 세계 전체를 바꿔나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돈만 밝히는 능글맞은 속물 같지만 엄청난 문제 해결력과 소중한 이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지닌 로이드 프론테라는 솔직하고 유쾌한 매력을 발산하는데요. 갑자기 달라진 주인공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이 흥미진진합니다. 여기에 로이드 프론테라가 자신의 작업에 거의 중장비처럼 활용하는 환상종(상상 속 동물)들을 주목하셔야 하는데요. 500년간 잠만 잔 고대 마수 출신마저 정말 환상적으로 귀엽답니다.
블록(BLOCK)
카카오웹툰 ‘블록’(BLOCK·강형규)은 킬러가 되기 위해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3년간 훈련에 매진한 주시영이 주인공입니다. 아직 어설프기만 한 초짜 킬러에게 첫 타깃이 하달되고 생애 첫 작업(?)에 나서는데, 시영이 뭔가 하기도 전에 타깃이 제거됩니다. 두번째 타깃도 마찬가지. 문제는 이들이 모두 귀신에 빙의된 뒤 이상행동을 하고 목숨을 잃었다는 것. 그러고 보니 이들이 사는 동네가 좀 이상합니다.
“여기 공사 들어간 후부터 이 동네 사람들 다~ 미쳤잖아~!” 동네 사람을 모두 안다는 부동산 사장의 말마따나 기이한 연쇄 죽음을 쫓다 보니 재건축에 들어간 빌라가 한채 나타납니다. ‘도대체 덕호빌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어두운 뒷세계의 잔혹한 폭력을 그린 하드보일드 웹툰을 찾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무속을 다룬 작품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죠. 그런데 그 두가지가 이렇게 미스터리하게 결합된다고요? 초반부터 흡입력이 대단한데, 무엇보다 앞으로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될지 정말 하나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회차가 넘어갈수록 분명해지는 건 사람의 욕망이 귀신보다 무섭다는 것뿐입니다.
로드 오브 머니
재계 서열 5위 지경그룹 총수의 셋째 아들 천중명의 비서 성창욱은 천중명의 막무가내식 행동을 참지 못하고 사표를 던집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천중명은 성창욱을 함정에 빠뜨린 뒤 감전사시키려 하는데요. 성창욱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혼신의 힘을 짜내 천중명을 끌어안고 쓰러지고, 다시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서로의 영혼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카카오웹툰 ‘로드 오브 머니’(손주환, 무장)는 2020년 말 연재를 시작한 인기 웹툰으로, 흙수저 출신 비서가 재벌가 망나니 아들과 영혼이 바뀌면서 겪게 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조폭들을 때려눕히는 극강의 무술 실력부터 협력업체에 대한 갑질을 막고 계약직 직원들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버리는 것까지, 천중명이 된 성창욱이 보여주는 모습은 판타지 그 자체입니다.
이런 내용이 어떤 분들에게는 비현실적이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이런 판타지적인 쾌감이 바로 웹툰의 매력 아닐까요? 형들과의 경영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둬 회장 자리에 오른 천중명이 지경그룹을 노린 외국 투기세력을 박살낸 데 이어, 최근에는 국내 악덕 재벌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과연 천중명 회장은 이 세계에서 어디까지 지경그룹과 세상을 바꿔나갈지 함께 지켜보시죠.
미래의 골동품 가게
영화 ‘파묘’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형 오컬트 무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이 바로 네이버웹툰의 ‘미래의 골동품 가게’(구아진)였습니다. 웹툰 중에 ‘파묘’보다 더 대단한 작품이 있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추천했었죠.
이 작품에서 주인공 미래는 남해 먼바다의 섬 해말도에서 만신인 할머니 연화와 살아가는 소녀인데요. 어느 날 섬에서 벌어진 악귀 이매신과의 대결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저주를 깨닫고 이에 맞서기 위한 긴 여정을 떠나게 됩니다.
무속은 물론 동양철학과 상고사 등을 바탕으로 이 작품이 그려내는 스토리의 깊이는 정말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때론 섬뜩하고 때론 섬세하면서도 화려한 작화 역시 스토리 못지않습니다. 시즌1 말미에서 언제나 미래를 따뜻하게 지켜주던 칠성 할아버지가 미래를 서울로 떠나보낸 뒤 내뱉는 독백 장면은 아름다운 작화와 마음을 울리는 대사로 제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겨주었습니다.
‘미래의 골동품 가게’는 각종 문화콘텐츠 상을 수상하고, 드라마와 애니메이션 제작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주목받는 작품입니다. 특히 웹툰 좀 보시는 분들에게는 이미 상당히 알려진 작품이라 추천을 조금 망설이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아직 웹툰 세계에 입문하지 않았거나 입문 초기여서 이 작품을 보지 못한 분들을 위해 ‘명절 웹툰 보기 퀘스트’에 포함시켰습니다. 이 퀘스트를 수행하면 보상으로 웹툰에 대한 선입견을 무너뜨리는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한겨레 차경모 웹툰 애호가 /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