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조명을 든 채 카메라를 응시할 때, 눈빛에서 강한 흡입력을 느꼈어요
섬에 갇힌 공주가 된 것처럼 임했습니다(웃음). 광기가 살짝 서려 있답니다. 도수 없는 렌즈를 끼고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촬영하는 게 좋아요. 더 용감해지는 것 같거든요.
올해도 벌써 하반기입니다. 어떤 한 해를 보내고 있나요
일도 열심히 하고 잘 쉰 것 같아요. 두 달을 방학처럼 통으로 쉬었는데, 이 쉼이 〈파친코〉 시즌1이 세상에 나온 후 첫 휴식이더라고요.
8월 23일 〈파친코〉 시즌2가 공개됩니다. 시즌1 때와는 마음이 또 다를 것 같아요
시즌1 때는 촬영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모른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시즌2 때는 정반대였어요. 모든 스태프가 저를 알아봤죠. 시즌제의 고충도 겪었어요. 시즌1에서 내가 만들어놓은 선자 역할을 그대로 유지한 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의 모습을 미묘하게 표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애써야 했으니까요. 익숙한 작업 환경에서 비슷한 듯 다른 촬영을 경험했습니다.
고민했던 부분이 잘 담겼을까요
진짜 모르겠어요! 두 달 동안 생각 없이 놀았더니 어느새 공개일이 훌쩍 다가왔더라고요. 이 질문을 받으니 갑자기 떨리고 긴장되네요.
선자 역할은 완전히 손에서 떠났군요. 촬영이 끝나면 역할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편인가요
아뇨. 촬영할 때로 돌아갈 수도 없고,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제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미련 없이 털어버리죠.
토론토에서 촬영하며 동료 배우들과 가족처럼 지냈다고요
많이 친해졌죠. 이 또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일터에서 사적으로 좋아하고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선배, 언니가 생겼다는 건 큰 축복이죠. 토론토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서로 의지하며 지냈어요. 은채 언니, 인지 언니, 모든 배우가 결속력이 좋아 서로 꽁꽁 안고 촬영했어요.
동료 배우들과 만든 사랑스러운 에피소드가 있다면
제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배우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한 상 대접했어요. 토론토에서는 잘 못 먹는 한식을 요리했죠. 다 같이 먹으면서 대화했던 시간이 너무 소중한 거 있죠. 요즘도 만나면 그때 참 좋았다는 말을 해요. 〈파친코〉가 이민자 이야기인데, 우리도 타국에서 몇 개월 동안 가족과 떨어진 채 촬영했잖아요. 누구도 연락할 수 없는 오지로 떠난 건 아니지만, 외로움을 우리끼리 채웠죠.
이번 촬영현장에서 주된 대화 주제는 무엇이었나요
각 인물이 품고 있는 희망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시즌2에는 세계대전처럼 시즌1 때보다 더 극적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거든요. 가족을 잃고 피폐해진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나오지만, 그 안에서 내가 가져야 할 재미나 희망은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를 자주 했어요. 어떤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힘이 어떤 결속력을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였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게 배우라는 직업이 가진 재미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당시 삶을 느껴보며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처음에 작가님, 감독님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전쟁 통에 먹고살기도 힘든데 희망이라는 게 있었을까 싶었죠. 고민하다가 선자에게 나를 대입해 봤어요. 저는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내게 닥쳤던 최악의 순간에도 항상 웃을 일은 있고 웃는 날도 있었더라고요. 삶을 살아갈 때 희망의 끈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그 희망의 끈이 전쟁 중인 당시에도 존재하지 않았을까 계속 상상해 봤어요.
우리는 작고 사소한 전쟁 같은 매일을 살아가요. 민하 씨에게 희망의 끈은 무엇인가요
선자 역할을 고찰하며 나를 돌아봤어요.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나에게 희망의 끈이 많다는 걸 깨달았죠. 가족이나 강아지, 친구 그리고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작은 것들. 갑자기 문득 맡는 꽃향기, 아주 더운 날에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처럼 감각할 수 있는 소소한 것들이 큰 희망이더라고요. 경험상 저는 모든 게 절망스러웠던 순간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거든요. 더위와 추위도 못 느낄 만큼 오감이 닫혔죠. 그런 와중에 오감이 열리며 무언가를 확 느꼈을 때 그 순간이 정말 소중하고 고맙더라고요. 나에게 아주 큰 빛이었어요.
한 인터뷰에서 20대는 절망에 가까운 시간이었다고 말한 적 있어요. 30대에 들어선 지금 변화를 느끼나요
저는 30대가 되기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격동의 20대가 너무 싫었거든요.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존재였죠. 서른 살이 된 해부터 왠지 안정적인 느낌이 들어요.
내면이 편안해진 걸 체감할 때는 언제인가요
휩쓸린 감정과 진짜 감정을 구분할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호르몬이나 외부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파크처럼 튀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감정은 내면에서 우러나온 감정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걸 고통이라고 부르는데, 이제는 그런 고통을 잘 분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한 게 가짜 감정을 고통이라고 인지하는 순간 몸과 마음의 많은 게 달라져요.
달리 말해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지
그건 아니에요(웃음). 저는 아직도 ‘애기’예요. 모르는 게 너무 많거든요.
지난 7년간 배우로서 제일 먼저 배운 건 무엇인가요
듣기. 최근 몇 년 사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방법을 많이 배웠어요. 저는 연기가 누군가의 말을 듣고 관찰하며 내 것으로 만들어 내가 다시 분출하고 표현하는 행위 예술이라서 좋거든요. 연기로 분출하는 과정에서 잘 흡수하는 방법을 깨치게 됐어요. 대사를 주고받을 때도 상대방의 말을 듣죠. 그 말이 나에게 자극이 되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내 반응을 끌어내기도 해요. 듣는 법을 실생활에도 적용하고 있어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마음과 진심으로 듣는 걸 말해요. 이전에는 잘 듣는 것의 중요성을 몰랐는데 어느 순간 알게 됐어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지금 김민하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동화일까요
그러게요. 제 이야기는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 중인 걸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인가요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런 구간도 있었죠. 그래서 느낀 바도 컸고요.
지금은 어떤 구간을 지나는 중인 것 같나요
약간의 높낮이가 있는 모노레일을 타고 가는 것 같아요. 재미있어요. 조금 높은 구간을 지나고 있어요. 제가 고소공포증이 있거든요. 지금이 안정기가 아니어서 불안하지만, 그래도 공포증을 이겨내고 싶은 마음이랄까요. 도전할 게 아직 많으니까요. 한 발자국씩 서서히 높은 곳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조금 재미있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어느 정도의 불안감은 완벽한 안정감을 만든다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걸 조금은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된 것 같고, 언제 또 고꾸라지고 힘든 세월을 겪게 될지 모르지만 이런 상태가 재미있기도 해요.
여전히 해보고 싶은 캐릭터가 있다면
〈블랙 스완〉의 ‘니나 세이어스’(내털리 포트먼) 역과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 골라이틀리’(오드리 헵번) 역이요. 아, 최근에 갑자기 갱신된 건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 역입니다. 브리짓 존스를 연기할 당시 르네 젤위거가 서른 살이었더라고요. 노처녀에 대한 이야기를 연기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어요. 서른 살인 저는 매일 아침 엄마부터 찾는데(웃음).
배우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딱 하나, 나 자신. 내가 배우 일을 하는 이유,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 내가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보는 것, 내 가치관. 모든 것에 나만의 것을 부여하고 싶어요. 고집을 부리겠다는 건 아니에요.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 내가 하는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돼버릴 것이고, 모든 게 끝날 거예요. 그래서 자기관리는 최우선 순위예요. 그래서 명상과 운동을 하고 책을 읽죠.
촬영현장에서 만난 선배로부터 들은 한 마디 중 기억에 남는 것은
너무 많은데…! 최근 엄정화 선배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민하야. 착해서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어.” 너무 맞는 말이죠. 정말 와닿았어요. 그리고 친구들과 대화 중에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존중하기 어려운 것 같아”라는 말이 오갔어요. 대화한 지 3주 정도 지났는데 아직도 이 문장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김민하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차가웠던 나를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힘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초인적인 힘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희생정신과 책임감을 이끌어내죠. 그렇기에 세상을 살리는 건 사랑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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