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엘르〉와 만났을 땐 〈더 글로리〉 파트2 공개를 앞뒀던 시점이었어요. 설레고 약간은 긴장되던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떤가요
굉장히 아득하고 오래전처럼 느껴져요. 저만의 추억이자 너무 소중한 작품이 됐지만, 오랜 과거의 한 장면 같달까요. 저는 새로운 작품에 들어가면 그것에 몰두하는 편이라 지나간 캐릭터나 지나간 일을 오래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요. 가끔 SNS나 유튜브에서 동은이와 마주하면 새롭게 느껴질 때도 있어요.
후련하게 놓아주는 편이군요
작품마다 걸리는 시간은 다 다르겠죠. 어릴 땐 어떤 작품은 1~2년이 걸릴 때도 있고, 마음에 남겨둔 상태에서 다음 작품에 들어간 적도 있었어요. 전보다 확실히 빨라졌네요. 찍는 동안 그 시간을 충분히 느끼고 즐기니까 그럴 수 있는지도 몰라요.
동은은 보냈지만 송혜교는 어떻게 남아 있나요
처음 도전한 장르였기 때문에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나 두려움도 컸는데, 다행히 많은 사랑을 받았잖아요. 새로운 재미가 생겼어요. 앞으로 더 잘할 수 있겠다는 믿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마음 그리고 해보지 않던 것에 도전하고 싶은 용기가 생겨났죠.
그런 용기는 지금 개봉을 기다리는 〈검은 수녀들〉로 이어질 테죠. 송혜교가 그려내는 오컬트라니! 예상치 못했습니다
꼭 오컬트 장르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더 글로리〉의 다음 작품으로 멜로나 사랑 이야기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장르물을 연기하는 재미를 찾고 나서 그에 대한 막연한 계획을 갖고 있을 때 마침 〈검은 수녀들〉을 만나게 된 거죠. 〈더 글로리〉를 끝내고 쉬는 타이밍에 인연이 잘 닿은 것 같아요.
원래 오컬트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나요
마니아까지는 아니지만 꽤 잘 봐요(웃음).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공포영화나 오컬트영화를 좋아하셔서 나름 익숙했죠. 물론 심하게 놀래거나 무서운 장면은 눈을 가리고 보지만…. 관객 입장을 넘어 장르 안에서 연기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도전을 완수한다면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컸어요.
당신이 그려낼 유니아 수녀는 강한 의지와 거침없는 행동으로 한 소년을 구하려는 사람입니다. SNS 스토리에 올린 대본 표지 사진만 봐도 영화의 압도감이 느껴져요
동료 배우들도 좋았고, 팀에 베테랑 제작진이 많아 그분들의 손에서 다시 태어날 겁니다(웃음). 후반작업이 많은 작품이라 저도 기대되네요.
개인적으로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영이나 〈더 글로리〉의 동은처럼 약간 어둠이 드리운 당신의 얼굴을 좋아합니다. 그 밝음과 어둠 사이를 오가는 일이랄지, 배우에게 신뢰와 도전, 다시 증명 사이를 유영하는 일은 고되겠지만 그 여정의 즐거움도 있겠죠
상황이 바뀌면 연기를 다르게 하게 되죠. 모니터로 누군가를 위해 싸우는 제 얼굴을 보니 ‘이런 얼굴이 있네’ 싶으면서 새로웠어요. 관객분들께서는 어떻게 느끼실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지만, 도전 그 자체로 즐거운 것 같아요.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배우 수지와 함께한 사진을 봤습니다. 참 예뻤어요. 선배 김혜수와 훌쩍 여행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나 후배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장면을 보면, 늘 이 멋진 여성들은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눌지 참 궁금하더군요
선배들을 만났을 땐 이야기를 잘 들으려는 편이에요. 궁금한 부분이 생기면 여쭙기도 하죠. 후배나 동료들은 친구 같아요. 같은 곳에서 일하고, 저도 어릴 때 일을 시작했는데 수지 씨나 다른 후배 친구들도 어릴 때부터 활동해서인지 나이 차가 나지만 지나온 과정은 비슷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가 지나간 길을 그들도 걸어오고 있기에 언니로서 그때 느낀 아쉬움에 관해 얘기할 뿐 제 생각을 주입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때의 나와 지금 친구들의 생각과 환경은 분명 다를 것이기에 서로의 생각을 나눌 뿐이죠. 그 시간이 참 좋더라고요.
한국영화와 드라마의 팬으로서 이렇게 이어지는 연대가 늘 든든하게 느껴집니다. 당사자도 그런가요
그럼요. 저는 인복이 많다고 생각해요. 제가 사랑하는 분들은 신기하게도 모두 제게 힘이 돼주세요. 응원하고 응원받는 관계. 그래선지 가끔 봐도 매일 본 것 같아요.
〈검은 수녀들〉을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라고 표현한 게 재밌습니다. 인연을 믿나요
인연은 분명히 있고, 모든 건 저마다 타이밍이 있어요. 아무리 원해도 안 되는 일이 있듯이. 그러다 타이밍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 순간과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송혜교와 인연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웃음)? 어떤 사람들을 좋아하는지
그저 앉아서 소소하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주는, 그런 진솔한 얘기를 하는 사람. 험담하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처음 만났는데 누군가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면 호감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정말 가까워져서 서로의 힘듦을 털어놓을 수는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서 저도 좋은 영향을 받아요.
펜디와의 인연도 마찬가지죠. 당신이 펜디와 함께할 때 나오는 마법 같은 순간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거의 4년을 함께했더군요. 이렇게 한 브랜드와 인연이 오래 이어지는 건 정말 특별해요. 마음이 맞는 것에 큰 의미가 있고, 펜디 식구들과도 정말 친해져서 애착이 더 가요. 하우스 자체의 매력도 좋지만 크루들과 함께한 추억과 시간이 많으니까 더 그런 것일지도 몰라요.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렸네요. 이번 기회로 파리 내 한국 독립운동 유적지를 알리는 안내서를 기증했고, 서경덕 교수와 함께 13년째 한국 독립운동 유적지를 알리는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당신에게는 왜 중요한 일인지 궁금했어요
교수님께서 정말 열심히 해주셔서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도 제 일을 하느라 꼼꼼히 챙길 수는 없지만, 서경덕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역사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고, 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접하게 되니 감사한 것 같아요. 교수님이 함께 하지 않으셨더라면 저도 10년 넘게 이어오지 못했을 거예요.
이 활동은 물론, 학교 폭력에 대한 수많은 고백이 이어진 〈더 글로리〉의 동은 혹은 곧 빛의 세상에 등장할 〈검은 수녀들〉의 유니아를 보면 당신이 히어로나 마법소녀 같다는 상상마저 해봅니다. 세상에는 마법이 필요할까요
어릴 때는 그런 존재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어요. SF 장르도 좋아하지 않았죠. 현실 같지 않다고 생각해서 재미를 못 느꼈는데, 지금 보면 참 재밌고 느끼는 게 많아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정반대가 됐죠. 특히 요즘 여성 캐릭터들의 개성이 강해졌고, 좋은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이 많아졌단 걸 느껴요. 이 상황이 반갑죠.
인터뷰를 준비하며 2012년 발간된 포토 에세이 〈혜교의 시간〉을 다시 펼쳤습니다. 그때 당신은 자신을 표현하길 잠을 많이 자는 걸 좋아하고 화장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여자라고 했어요. 여전한가요
바뀐 것 같습니다. 요즘은 잠을 많이 자지 않고 화장을 조금이라도 하고 나가요(웃음).
지금도 그대로 갖고 있는 면은
그것 빼고는 똑같아요. 제 가치관이나 생활, 만나는 사람들까지 별로 변한 게 없죠. 물론 작품을 하며 새롭게 알게 된 친구들도 생겼지만.
배우 일은 어떤가요. 이 직업이 오랜 친구라면
배우라는 직업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해왔고, 그만큼의 책임감을 갖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작품이 잘됐을 때나 안 됐을 때도 늘 똑같이 열심히 했고, 주어진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거든요. 하지만 결과가 늘 좋지만은 않죠.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혹은 미래에도 늘 해왔던 대로 열심히 할 거예요. 비판받을 것은 받고, 칭찬받을 때는 또 칭찬받으면서요.
〈혜교의 시간〉 서문에서 노희경 작가는 당신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 한 가지, 그녀는 지금 이 순간도 끝없이 제 가능성을 확장하며 주변의 단정을 잠재우고 있단 거다.” 12년 전에는 이 말이 어떻게 느껴졌나요
선생님과는 작품 때마다 워낙 대화를 많이 나눴어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더욱 그런 배우이자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 주변에는 좋은 어른이 많이 계세요. 삶이 늘 행복하지만은 않잖아요. 그럴 땐 항상 주변 어른들이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잘 잡아주셨어요. 그래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잘 살려고, 늘 괜찮은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말로 다가오나요
그저 내 자리에서 맡은 것을 오롯이 해내면 된다는 말. 다른 것을 생각하기보다 그저 내게 주어진 것을 열심히, 묵묵히 한다면 어쩌면 늘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그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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