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박훈정 감독이 오랜만에 캐릭터의 맛과 멋을 제대로 살린다. 감독이 차린 한상 차림의 메뉴들은 분명 여러 번 먹어본 익숙한 맛이지만, 풍미를 돋우는 향신료를 추가한 덕분인지 오감을 자극하는 새로운 맛으로 되살아난다. 그 향신료의 역할은 작품을 이끄는 4색의 캐릭터가 해냈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폭군'(제작 영화사 금월)은 이른바 ‘박훈정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영화 ‘마녀’ 시리즈와 ‘낙원의 밤’, ‘귀공자’로 이어진 박훈정 감독만의 서늘한 액션의 세계를 충실히 따른다. 퇴로가 없는 궁지에 몰린 주인공들과 잔인하다 못해 잔혹한 악당들이 맞붙은 살육전에 가까운 액션도 어김없이 이어진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세계관의 연결’이지만, 냉정히 평가하면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 익숙함을 상쇄하는 힘은 캐릭터에서 나온다. 이야기를 이끄는 4명의 배우, 조윤수와 김선호, 차승원과 김강우가 익숙한 듯 낯선 얼굴로 미스터리한 폭군 프로젝트의 비밀을 추적한다.
● 캐릭터 설명과 서사 최대한 생략…궁금증 유발
‘폭군’은 국정원의 한 파트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폭군 프로젝트가 폐기될 위기에 처한 긴박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프로젝트와 관련한 정보와 샘플을 모두 회수하려는 기관과 다른 쪽에서 이를 쫓는 미국의 압박 속에 프로젝트를 지휘한 최국장(김선호)은 마지막 남은 샘플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고 한다. 그리고 샘플을 옮기는 임무가 킬러이자 금고 기술자인 자경(조윤수)에게 전달된다.
자경은 두 개의 자아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사라진 오빠의 인격이 그녀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누구를 만나든 특유의 민첩함과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그는 몰래 샘플을 빼돌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미국의 대리인 폴(김강우)은 샘플을 빼앗기 위해 최국장을 쫓는다.
다른 한편에선 폭군 프로젝트의 실체를 눈치 챈 인물들이 하나둘씩 죽어간다. 그 임무는 은퇴한 적진 요원 임상(차승원)이 맡고 있다.
‘폭군’은 이들 4명의 인물들이 샘플을 찾는 추격전에 집중한다. 이야기는 특별할 게 없다.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캐릭터에 대한 묘사도 심플하다. 이들이 지닌 사연과 과거의 관계에 대한 상상은 온전히 시청자에게 맡기겠다는 방식이다. 때문에 인물들이 서로 엮이면서 만들어지는 입체적인 추격전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캐릭터를 이해할 만한 상황이나 설명도 최대한 축소한 인상이다. 인물들의 ‘전사’는 생략하고, 폭군 샘플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목적을 위해서만 달린다. 그 가운데 자경만이 샘플의 실체를 모른 채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들을 향한 복수의 여정에서 폭군 프로젝트와 더 깊숙하게 엮인다.
때문에 작품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자경이다. 유일하게 시작부터 변화의 과정을 감지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폭군’은 곧 자경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자신을 궁지에 몬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총과 칼을 빼들고 질주하는 자경이 끝내 맞이하는 결말은, 2018년 박훈정 감독이 내놓은 영화 ‘마녀’와 맞닿아 있다.
‘폭군’이 일명 ‘마녀 유니버스’의 프리퀄로 평가받으면서 자경의 존재감이 단연 부각되는 이유다.
● ‘화면 밝기’ 조정하게 만드는 어둠의 그림자
영화에서 ‘폭군’은 초인적인 힘을 지닌 인간을 만드는 비밀 실험이다. 최국장은 자신이 주도해 만든 신기술을 더 이상 미국 등 강대국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핵도,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우리나라는 가질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런 최국장을 향해 폴은 “애국 보수 청년”이라고 일갈한다. 최국장의 신념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지만, 시종일관 죽고 죽이는 날선 살육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애국’을 논하는 이야기가 다소 쌩뚱맞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최국장의 편을 들고 싶게 만드는 건 김선호의 힘이다. 지난해 영화 ‘귀공자’에 이어 박훈정 감독과 다시 만난 김선호는 웃음기를 거둔 낯선 얼굴로 극을 지배한다. 그가 맞는 최후가 충격적이지만, 한편으론 처연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김선호의 마지막 얼굴이 불러온 감흥 때문이다.
‘폭군’은 당초 영화로 기획돼 촬영을 진행하다가 4부작 시리즈로 방향을 틀었다. 이야기를 더 폭넓게 보이려는 제작진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4부작으로 공개한 이야기를 2시간 분량의 영화로 축약했다면 안그래도 생략된 서사와 설정은 더 난해하게 다가왔을지 모른다.
다만 캐릭터의 매력이 확실하고, 시리즈로 선회한 선택이 영리했다고 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각각의 캐릭터가 불러 일으키는 호기심을 제외한다면 ‘폭군’는 이야기 뿐 아니라 액션도 크게 새롭지 않다. 마치 괴력을 발산하듯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액션 설계는 박훈정 감독의 시그니처로 꼽히고, 그만큼 관객이 반복해 봐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폭군’은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몇몇 액션 장면들을 시종일관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벌어지도록 설계해 보는 내내 ‘화면 밝기’를 조정하게 만드는 수고스러움도 야기한다. 폭군 프로젝트의 비밀과 얽힌 설정 때문이라고 해도, 굳이 이렇게 어둡게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 보는 내내 감독의 의도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감독 : 박훈정 / 출연: 조윤수, 차승원, 김선호, 김강우 외 / 장르: 액션 / 공개일: 8월14일 / 관람등급: 19세 이상 관람가 / 회차: 4부작 / 플랫폼 : 디즈니+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
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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