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말 가운데 내가 믿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또 술을 마시면 내가 개다! 둘째, 이놈의 야구, 내년엔 보나 봐라! 그러나 그들이 이토록 비장한 결심을 공표하는 이유는 그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인 듯하다. 숙취의 고통으로 허우적대던 사람은 1주일도 못 가서 술 약속 밑밥을 깔고, 스토브리그 동안 큰소리치던 사람은 개막이 다가오면 은근슬쩍 시범경기 중계를 튼다. 즉 앞선 부정의 과정은 원점으로 돌아가 더 뜨겁게 불사르기 위한 일종의 의식인 것이다. 술도 안 마시고 야구도 안 보는 나는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이런 진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축구 선수 덕질은 해봤지만, 경기 관전에 재미를 느낀 적은 없다. e스포츠 선수 생일 파티엔 가봤지만, 게임을 해본 적은 없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스포츠에 몰입하지 못하는 내가 과몰입 야구 팬과 함께 산 지 그럭저럭 10년이 돼간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수도권 호남 2세인데, 전라도 출신이라고 해서 기아 타이거즈 팬이라는 건 선입견이겠지만 일단 남편은 타이거즈 팬이다. 타이거즈는 KBO 리그 사상 최다 우승 팀이고 한국 시리즈 결승에 열한 번 올라 단 한 번도 준우승한 적 없으며(모두 우승했다는 뜻이다), 마지막 우승은 2017년이었고…. 나에겐 아무 의미 없는 정보인데도 툭 치면 줄줄 흘러나온다. 야구를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과 〈H2〉로 배운 사람에게 현실의 야구 팬은 매우 흥미로운 존재다. 매년 3월 말부터 9월까지(잘하면 ‘가을 야구’까지) 1주일에 엿새 동안 거실에 백색 소음처럼 켜져 있는 프로야구 중계를 서당 개 입장에서 지켜본 결과, 나는 야구 팬을 상징하는 사자성어가 ‘일희일비’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이것은 모든 스포츠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야구에는 확실히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들이 아주 잘게 쪼개져 존재한다. 한 번의 투구, 한 번의 스윙, 한 번의 에러….
놀라운 건 야구 팬은 이 모든 순간마다 진심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이다. 모니터를 향해 혼자 분노하고 훈수 두고 감격하다가 누군가 홈런이라도 치면 벌떡 일어나 소리 없이 기쁨의 붐바스틱을 추는 모습은 맨 정신으로 혼자 보기엔 다소 아깝다. 더 웃긴 것은 야구 똑바로 안 하냐고 목에 핏대를 세우다가도 그 선수가 안타라도 치는 순간 “널 믿었다!”며 태세 전환하는 순간이다. 요즘 내가 최소 이틀에 한 번꼴로 듣는 멘트는 “도영아, 네가 여기서 뭐 하나 해줘야지!”인데 ‘도영이’는 기아 타이거즈의 3번 타자 김도영으로 이종범의 뒤를 잇는 엄청난 스타가 될 재목이며, 요즘 기아의 람보르기니로 불리는 선수임이 자동 입력될 정도다. 며칠 전에는 김도영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야구 팬에게 “누가 보면 아주 김도영 낳은 줄 알겠어?”라고 살짝 비꼬았더니 의기양양한 웃음과 함께 돌아온 대답은 “나 혼자 낳은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이 낳았지!”다.
야구 팬이 아닌 사람으로서 야구 팬을 신기하게 여기는 건 나뿐이 아닌 듯하다. 웹툰 〈루루라라 우리네 인생〉의 작가 현이씨는 야구 팬 지인을 따라 야구장에 다녀온 에피소드로 수차례 야구 팬을 (웃기고) 울린 바 있다. 그중 내가 깊이 공감한 대목은 야구 팬에게 만족이란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모든 구단의 모든 팬은 대부분 항상 화가 나 있다. 이길 때는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왜 못했던 거야!”, 질 때는 “왜 이렇게까지 못하는 거야!”, 꼴찌일 때는 꼴찌라서 화가 나고, 1위일 때는 1위라도 화를 낸다(이번 시즌 꾸준히 1위를 달리는 중인 타이거즈 팬에게 이유를 물어봤지만 명확한 답을 듣지 못했다. ‘타어강’의 아픔 때문인 걸까?). 그래서 야구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마음껏 미워하기 위해 사랑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이들의 심리를 추적하다 보면 현이씨와 같은 질문에 다다르기도 한다. “선생님, 근데 왜 야구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 세상엔 더 잘생기고 패배를 안겨주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그, 그러게 말이다.
프로야구 관중이 올해 1000만 명을 바라볼 만큼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젊은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이 유입된다는 얘기가 들릴 때마다 여성 팬을 ‘얼빠(스포츠보다 선수 외모를 보고 좋아하는 팬)’라며 폄하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인생의 절반 이상을 얼빠로 살아온 입장에서 말하자면 야구는 얼빠에게 적합한 스포츠는 아니다. 주위 여성 야구 팬의 증언에 따르면 그럴 만한 선수가 리그 전체에 약 두 명 정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메이저리그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국가대항전을 포함해도 승패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내가 흥분하는 쪽은 스포츠 경기보다 선거 때지만, 나는 스포츠가 사람들의 삶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듣기를 좋아한다. 직장에 다니는 한 친구는 시즌권을 끊어서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야구장에 간다. 편도염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던 날에도 야구장에 갔는데, 다녀오니 오히려 열이 내렸다고 한다. 소개팅 상대가 같은 야구 팀 팬이라는 걸 알고 급속히 가까워져 반년 만에 결혼한 언니 부부는 올봄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 여행을 다녀왔는데, 계기는 어느 날 야구를 보다가 “그래도 이정후 경기는 한번 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비록 경기를 보러 간 날 이정후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이 성실한 사람들이 모처럼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 사진은 웃음으로 가득했다.
점점 나이를 먹어갈수록 느끼는 것은 인생에 적당한 기대와 자극이 없으면 사람은 지치기도, 무너지기도 쉽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내 가슴을 끓어오르게 해주지 않을지라도 한 해의 절반 이상, 거의 매일 저녁 사람들의 가슴에(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마운드에서든) 불을 질러준다는 면에서 야구는 이 세상을 지탱하는 데 꽤 대단한 역할을 하는 스포츠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10점 차로 지고 있을 때도 “괜찮아! 한 회에 5점씩만 내면 돼!”라고 주문 같은 응원을 보내는 우리 집 야구 팬더러 진심이냐고 놀려먹는 마음 한편에는 모든 야구 팬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 비록 내 응원 같은 건 모든 수험생 여러분의 만점을 기원한다는 말만큼이나 의미 없더라도 말이다.
최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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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쓴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을 펴냈고, 뉴스레터 ‘없는 생활’을 발행한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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