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이단아이자 혁명가로 불린 알렉산더 맥퀸은 “패션쇼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쇼가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하이패션에서 테마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런웨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그는 특히 종종 영화에서 영감받아 참신한 쇼를 선보였는데,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를 비롯해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 등 다양한 거장의 작품을 런웨이에 반영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화의 스토리를 떠올리는 동시에 컬렉션을 이해하는 경험을 맛본다. 어떤 화려한 무대장치나 퍼포먼스, 값비싼 공간이 아니더라도 효과적으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반면 영화 신도 마찬가지. 탄탄한 스토리와 서사를 보다 완성도 있게 구현하고 스토리를 몰입감 있게 담아내기 위해 패션 하우스의 도움을 받곤 한다. 〈엘비스〉의 화려한 무대의상을 위해 프라다와 미우미우가 나서서 영화의상을 만들기도 하고, 〈스펜서〉 속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서사를 보다 사실감 있게 드러내기 위해 샤넬이 영화를 완성한 예만 봐도 그렇다. 이렇듯 오랜 시간 공생관계를 이어온 이들의 지금은 어떨까. 샤넬은 꾸준히 영화감독들을 지원하고 영화제작을 장려하는 데 공들이고 있다. 1930년 영화제작자 새뮤얼 골드윈의 영화의상을 제작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떠난 가브리엘 샤넬의 실제 이야기에서도 그렇듯 다양한 방법으로 하우스의 영화에 대한 애정을 종종 드러낸다. 이들은 특히 소피아 코폴라 감독과 특별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데, 2019/20 공방 컬렉션과 2021/22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비롯해 쇼 백스테이지 촬영을 위해 그녀와 협업하는 등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샤넬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프리실라〉를 지원했으며, 영화의상 제작에도 참여했다. 1967년 프리실라가 실제로 엘비스와 결혼식 때 입었던 드레스를 재해석해 영화의 주요 장면을 오마주하는 데 일조했다.
샤넬이 〈프리실라〉의 의상제작 일부를 담당했듯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너선 앤더슨은 루카 과다니노 감독의 영화 〈챌린저스〉에 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로에베는 이를 기념해 ‘I TOLD YA’ 티셔츠와 스웨트셔츠를 스페셜 에디션으로 출시하며 브랜드 마케팅을 진행하는 등 명민한 행보를 보였다. 단순히 영화의상에 그치지 않고 위트 있는 바이럴로 영화와 패션, 두 가지를 동시에 홍보했다는 평이다.
그런가 하면 최근엔 하우스 브랜드에서 영화를 투자하거나 직접 프로덕션을 설립하는 등 파이를 점점 넓혀가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대표적으로 생 로랑 프로덕션을 들 수 있겠다. 생 로랑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안토니 바카렐로가 이끄는 생 로랑 프로덕션은 2023년 4월, 생 로랑에서 자회사 생 로랑 프로덕션 설립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예술영화 제작사업을 시작했다. 영화제작을 시작한 최초의 패션 하우스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생 로랑 프로덕션은 2024년부터 본격적으로 장편영화 제작에 돌입했다.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스 Emilia Perez〉,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감독의 〈더 슈라우즈 The Shrouds〉,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파르테노페 Parthenope〉를 제작해 제77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했다. 컬렉션에서도 매 시즌 영화적인 패션 필름을 제작하는 안토니 바카렐로는 생 로랑 프로덕션이 브랜드를 이끄는 동안 컬렉션의 폭넓은 영화적 감성과 뉘앙스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패션 하우스들이 이제 패션 필름을 넘어 흥미로운 스토리텔링과 드라마틱한 패션을 담은 영화를 선보이며 패션과 영화의 관계가 한층 더 진화했음을 보여준다. 전 세계 여성감독과 미우미우가 함께하는 필름 프로젝트 ‘우먼스 테일(Women’s Tales)’을 이끄는 미우치아 프라다 또한 “영화는 내 오랜 열정이자 내 교육의 중요한 근간이다. 우먼스 테일을 통해 재능 있는 감독을 위한 플랫폼을 마련했다”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다. 미우미우의 우먼스 테일은 가장 심오하고 독창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여성감독의 시각을 통해 새로운 여성성을 탐구하고 현시대의 여성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공개된 우먼스 테일의 스물일곱번째 작품은 탄 추이 무이 감독이 연출한 〈I am the Beauty of Your Beauty, I am the Fear of Your Fear〉다. 이 영화는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내포하는 동시에 영화 전반에 미우미우 컬렉션이 스며들었다.
한편 구찌는 관객에게 하우스의 새로운 스토리를 소개하는 도구로 영화를 선택했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의 데뷔 쇼인 구찌 앙코라 패션쇼 탄생 비화를 담은 단편 다큐멘터리 〈구찌의 이야기, 사바토 데 사르노는 누구인가 Who is Sabato De Sarno? A Gucci Story〉를 공개한 것. 이 다큐멘터리는 구찌 앙코라 패션쇼 준비 과정을 구찌의 시각으로 담아내며 관객들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구찌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을 제공한다. 그뿐 아니다. 구찌는 제60회 백상예술대상과 함께하는 ‘구찌 임팩트 어워드’를 개최하기도. 2년 연속 이어온 이 어워드는 지역사회에 불균형과 공정성에 대한 목소리를 밀도 있게 담아 더 나은 내일을 만드는 데 기여한 작품에 상을 수상한다. 영화라는 종합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지며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럴싸한 홍보 마케팅 수단을 지나 서로가 주는 영감을 통해 ‘재미로 보고’ ‘의미도 남기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패션과 영화.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유의미한 공생관계가 선사할 새로운 챕터에는 또 어떤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새로운 패션을 기다리는 우리의 마음도 극장에 들어서는 관객의 마음과 같을 거다. 우리는 늘 이렇게 패션과 영화에서 새로운 감동을 얻길 바란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