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국가대표) 되려면 실력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협회 분들이랑 감독님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고.”
2020 도쿄올림픽(2021년 개최) 직전 방영했던 드라마 ‘라켓소년단’(SBS) 7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셔틀콕 천재’라 불리며 전승을 이어가던 한세윤(이재인)이 갑작스러운 컨디션 난조로 경기에 지자 코치는 의아해 이유를 물었다. 엄격하게 음식 조절을 해온 세윤이지만 경기 직전 배드민턴협회 간부가 준 커피를 거절 못해 다 마셨다가 탈이 나버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 누가 그래?” 반문하는 코치에게 세윤은 답한다. “쌤(선생님) 빼고요, 꼬맹이 때부터 지금까지 만난 모든 어른이요.”
방영 당시에는 평범한 드라마의 극적 요소로 여겨졌지만, 다시 보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최근 파리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안세영 선수가 작심 발언을 한 뒤 대한배드민턴협회의 반박이 이어지고 협회의 과거 일화들이 소환되면서 드라마에 촘촘히 박혀 있던 협회와 기성세대의 행태가 새삼 눈길을 붙잡는다.
세윤은 중학교 때 배드민턴 최연소 국가대표가 된 안세영을 모델로 만든 캐릭터다. 안세영이 우승 세리머니로 보여줬던 코믹한 춤을 세윤이 우승 세리모니로 했고, 안세영이 인터뷰에서 남긴 우승 소감이 드라마에 인용됐다. 안세영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드라마를 준비할 때 직접 인터뷰를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응답하라’ 시리즈 작가진 중 하나인 정보훈 작가는 안세영뿐 아니라 특별 출연했던 이용대 선수 등 전·현직 배드민턴 선수들과 관계자들을 만나 방대한 인터뷰를 진행해 드라마 설정과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소년체전 우승을 위해 분투하는 땅끝마을 십대들을 사랑스럽고 감동적으로 그리면서도 스포츠계 폭력이나 위계 문화, 패거리주의 등 현실적인 문제의식까지 풍부히 담은 것이 호평받은 이유다.
‘라켓소년단’에는 에너지 넘치는 7명의 소년·소녀 주인공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 2명이 등장한다. 틈만 나면 휴대전화에 빠져있고 호시탐탐 말썽을 부리는 사춘기 아이들에게 버팀목과 우산이 돼준 감독과 코치다. 경기 출장 숙박에 특실 아닌 일반실 예약을 하라고 잔소리하는 감독과 술 먹고 늦잠 자다 경기에 지각한 코치는 평범, 아니 그 이하의 어른처럼 보인다. 카리스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네 아저씨 같은 이들이 잘나가는 감독이나 협회 간부들과 다른 한가지는 아이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코치는 아이들과 함께 우승 세리머니를 궁리하고, 감독은 서울 출장 가서 아이들이 건네준 목록의 군것질거리를 사려고 빵집 앞에서 몇시간이고 줄을 선다. 오래전 감독이 학생 선수들을 패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돌 때 아이들만은 끝까지 자신들의 감독을 믿는다. ‘왜 그렇게 믿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입을 모은다. “감독님은 항상 우리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주시거든요.”
개인 운동이든 단체 운동이든 하나의 팀이 하나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갈 때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일 것이다. 옛날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권위만으로 믿음을 지탱할 수 있었지만, 드라마도 말하듯이 일방소통의 시대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이미 끝나가고 있다. 16부작 드라마에서 아이들은 여러번 좌절하면서도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어른들과 원팀을 이뤄 각자의 꿈에 다가간다. ‘라켓소년단’과 같은 해피엔딩을 드라마가 아닌 현실 배드민턴에서도 만나고 싶다. 사태 해결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대한배드민턴협회 임원진에게 이 드라마를 다시보기를 권한다.
한겨레 김은형 선임기자 /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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