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팔라완 북부에 있는 엘니도로 여름 휴가를 왔다. 한국인들이 아직 많이 찾지 않는 섬이라 어떨지 궁금했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매일 새로운 모험을 즐기고 있다. 어제는 스몰 라군(바다 호수), 오늘은 시크릿 라군을 찾아 거대한 기암 절벽을 배경으로 한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스노클링을 했다. 바다 아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광활하고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져서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나는 세상의 절반밖에 못 보면서 살아왔던 게 아닐까. 반으로 접혀있던 세계가 활짝 펼쳐지는 것 같았다. 산호와 물고기를 보고 신난 아홉 살 아이는 몇 번이고 “신비롭다”라고 말하며 바닷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못 견디는 나는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하는 습관이 있다. 발생 가능한 변수를 대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시나리오 쓰듯 계획을 세운다. 통제 욕구가 높아서 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나도 여행할 때만큼은 시뮬레이션 버튼을 끈다(정확히는 끄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여행에서는 시뮬레이션이 소용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여행을 통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여행의 경험을 구성하는 것들, 이를테면 날씨가 어떨지, 어떤 사람을 마주칠지, 음식 맛이 어떨지, 교통 상황이 어떨지 등은 내 통제 밖의 영역이다. 하물며 나와 여행 동반자들의 컨디션이 어떨지도 알 수 없다.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 속에서 나는 배영하듯 여행한다. 최대한 힘을 빼고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마닐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엘니도에 도착했을 때 이틀 연속 비가 내렸다. 세차게 퍼붓던 비는 금세 그쳤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했다. 여행을 하면서 배운 또 한 가지는 비가 오더라도 여행이 신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를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여행 둘째 날, 낙판 비치를 찾았다. 하늘이 맑은가 싶더니 이내 비가 쏟아졌다. 바다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비를 맞으며 수영을 했다. 바다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이 은빛 구슬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남편은 빗소리가 꼭 튀김 요리하는 소리 같다면서 점심은 튀김을 먹어야겠다고 말했다. 이날 점심에 먹었던 지중해식 오징어 튀김은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남편과 아이는 수영을 하고 나는 선베드 파라솔 아래에서 백수린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를 읽었다. 여름이면 꼭 찾아 읽는 백수린의 소설 속에서 나처럼 “범생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화자들은 “나와 타인을 가르는 경계선들을 세심하게 살”피면서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인식한다. 나의 작은 세계를 벗어나 타인에게 가닿고자 하는 시도는 자주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경험은 어떤 식으로든 내 안에 남아 나를 변화시킨다.
〈여름의 빌라〉에 수록된 작품 ‘흑설탕 캔디’에는 손주를 돌보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간 할머니 ‘난실’이 나온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음악학부에 진학했지만 결혼으로 대학을 중퇴해야 했던 할머니는 마음 붙일 곳 없는 낯선 타국에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 ‘브뤼니에’씨를 알게 된다. 브뤼니에씨가 치는 피아노 선율에 이끌린 할머니는 주기적으로 브뤼니에씨의 집을 찾아 피아노를 치고 CD 플레이어로 바흐와 모차르트를 듣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인과 사전을 사이에 두고 더듬더듬 대화를 나누면서 할머니는 비록 몸은 퇴화했더라도 “마음은 펄떡펄떡” 뛸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생에서 그토록 많은 좌절과 배신을 맛보고도 할머니에게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흑설탕 캔디를 삼킨 듯 천진하고 달게 차오른다. 다음은 내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각설탕 탑을 쌓는 데 아이처럼 열중하고 있는 브뤼니에씨를 보면서 난실이 품었던 생각.
– 백수린 〈흑설탕 캔디〉 중에서
자꾸만 시뮬레이션을 하게 되는 마음 밑바닥에는 실패하기 싫은 마음, 상처받기 싫은 마음, 약해지기 싫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삶이 주는 대부분의 놀라움과 기쁨은 “계획이 어그러지는”,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다. 내려놓고 비워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이 또한 여행에서 배웠지만 여행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책을 읽고 있는데 깡마른 개 한 마리가 내 옆에 있는 선베드 아래쪽으로 파고 들어가 비를 피했다. 좀 전에 아이가 빵을 나눠줬던 개인 듯하다.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서 개는 곤히 잠에 들었다. 처음 만나는 개 옆에서 나도 까무룩 잠을 청했다. 한국에 두고 온 일들도, 일상으로 돌아가 해내야 할 일들도 일단 지금은 잊기로 한다. “우습게도 느닷없이 아무래도 좋다”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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