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 돼 있습니다)
“영화를 만들 때는 ‘잘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데, 개봉을 앞두고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BEP(손익분기점)를 생각하게 된다.”
설렘보다 걱정이 앞선 듯했다. 오랜만의 복귀인 데다가, 그 사이에 시장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 탓이다.
추창민 감독은 8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영화 ‘행복의 나라'(제작 파파스필름, 오스카10스튜디오)로 인터뷰를 갖고 “같이 일한 스태프의 노고에 보답할 수 있게 흥행적으로도 의미 있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오는 8월14일 개봉하는 ‘행복의 나라’는 상관의 지시로 대통령 암살 사건에 연루된 군인의 변호를 맡게 된 변호사의 이야기로 조정석, 이선균, 유재명이 출연한다. 영화는, 1979년 10월26일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생을 마친 박흥주 대령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행복의 나라’는 지난해 1000만 흥행을 달성한 ‘서울의 봄’을 이어 현대사 열풍을 이끌 또 하나의 팩션으로,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일찌감치 1000만 관객의 마음을 훔친 추창민 감독이 연출을 맡아 관심을 모은 작품이기도 하다.
‘행복의 나라’로 ‘7년의 밤’ 이후 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추 감독을 만나 영화의 연출을 맡은 계기부터 개봉까지의 과정을 들어봤다.
-‘행복의 나라’의 연출을 한 차례 고사를 했다고 들었다. 다시 맡게 된 과정은.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를 NEW와 함께 했다. 그 이후에 NEW에게서 이 작품의 제안을 받았다. 그때가 벌써 12, 13년 전의 일이다. ‘행복의 나라’는 시나리오가 좋아서 충무로에서 유명했다. 저 말고도 많은 감독에게 건네졌다. 시나리오는 좋았는데 왜 그랬는지 그 당시에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7년의 밤'(2018)을 하고 나서 차기작을 고민하는데 이 작품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시나리오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보니 아무도 영화로 완성을 못 했더라. 주변에서는 유효기간이 지난 프로젝트라고 말렸는데 더 오기가 생겼다. 내가 한번 고쳐보겠다고 하고 시나리오를 각색했는데 투자가 이뤄져서 다시 프로젝트가 시작될 수 있었다.”
-각색 방향은.
“원래는 박태주(이선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그 사람이 겪은 일련의 일들과 가족들의 이야기로. 나는 박태주, 정인후(조정석), 전상두(유재명) 세 인물을 중심으로 원래의 시나리오보다 덜 감성적으로 접근했다.”
-1979년이 배경이지만 특정 시대의 이야기로만 보이지 않는 것 같다.
“특정 시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면 10·26과 12·12 사건에 초점을 뒀을 거다. 그 두 사건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와 그 시대를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상두도 특정 인물을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시대의 야만성을 드러내는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정인후는 성장하는 시민으로, 박태주는 권력자에 짓밟히는 희생자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런 시민과 희생자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니까 보편적인 이야기로 봐준 게 아닐까.”
-정인후가 전상두에게 찾아가서 사정하는 골프장 장면에 대해 ‘판타지 같다’는 지적도 있다.
“영화는 개인(감독)의 판타지가 아닐까. 성에 대한 판타지가 있으면 멜로 영화를 하는 거고 액션에 대한 판타지가 있으면 액션 영화를 하는 건데 골프장 장면이 나한테 그런 의미다. 사실 일개의 변호사가 권력자를 찾아가서 일갈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저항하는 누군가는 늘 있어왔고 지금도 있지 않나. 이 이야기가 사회의 부조리, 불합리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고 보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저항하고 한발한발 나아가는 정인후의 모습이 저한테는 판타지였던 것 같다.”
“‘왜 골프장이냐’는 이야기가 많은데 실제 전두환이 골프를 좋아했다고 한다. 권력자들은 함부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욕망을 드러낼 장소로 개인적인 장소가 필요했고, 골프장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
-조정석에게 그와 같은 인물(성장하는 시민)을 맡긴 이유는.
“정인후가 위대한 변호사였으면 조정석에게 안 맡겼을 거다.(웃음) 세속적이었던 정인후가 원칙과 신념을 중시하는 박태주에 의해 점차적으로 변해가는데, 성장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설득시키는데 조정석 만한 배우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재명은 한 차례 배역(전상두)을 고사했다고 하던데.
“처음부터 전상두가 전두환이라는 실존 인물에서 출발한 캐릭터여서 선뜻 하겠다고 나서는 배우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유재명이 선택하기 전에 다른 유명한 배우를 접촉했는데 대본을 보더니 ‘분량도 많지 않은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 ‘차라리 신인을 써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그렇다고 지명도가 없는 배우는 쓸 수가 없었다. 배역의 힘이 빠지면 안 되니까.”
“전상두는 간교하고 사악하고 숨어서 어떤 일도 벌일 수 있는 인물처럼 보였으면 했다.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는 뱀이다. 유재명이 우리 영화에서 보여준 눈빛이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유재명의 머리는 분장이 아니라 실제로 깎은 머리라고 들었다.
“유재명이 배역을 하기로 결정하고 제일 먼저 자신을 ‘마음대로 쓰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깎자’고 말했다. 사실 주연도 아닌데 머리를 밀면 이 작품 하는 동안 다른 작품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고마웠다. 머리를 깎는 건 큰 고민은 없었는데 자칫 희화될까 우려되긴 했다. 희화되는 순간 인물이 가진 사악함이 희석된다고 생각해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머리를 완성했다.”
-왜 박흥주 대령이었나.
“박흥주 대령이 자료 조사를 해보니 굉장히 모진 분이었다. 공부를 잘했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육사를 선택했고, 옥사 톱 클래스로 졸업해서 최전방과 월남전 등을 거쳤다. 권력의 요직에 있으면서도 당시 가진 재산이 400만원 밖에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대통령 암살 사건에 가담한) 마지막 행위 때문에 그 사람의 전체 삶이 호도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 없지만 (박흥주 대령이) 과거에 이런 삶을 살았다고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박태주에) 사실적으로 녹이려고 했다.”
-박태주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선균과 어떤 대화를 나눴나.
“이선균이 온라인에 있는 박흥주 대령의 사진 속 얼굴을 보고 너무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사진 속 얼굴에서 ‘뭐가 느껴진다’고 했다. 박흥주 대령의 얼굴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면서 연기적으로 어떻게 해야겠다고 숙지했던 것 같다.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멋지게 연기했다.”
-영화의 내용을 생각하면 ‘행복의 나라’라는 제목은 아이러니하다.
“시나리오 받을 때부터 ‘행복의 나라’였다. 포스터 글씨를 자세히 보면 폰트가 깨져 있고 몇몇 철자들이 반대로 표기돼 있다. 불안전한 행복을 보여주는 거다. 지금은 불행하지만 앞으로는 행복하고 싶고, 행복해야 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설정했다.”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부분은.
“법정 신이었다. 군사법정을 본 사람들이 거의 없지 않나. 그 당시에 법정에 M16 소총을 든 군인들이 있고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고. 역사의 기록 같다 생각돼서 제대로 구현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박태주가 정인후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여운 깊다.
“그 대사가 의도적으로 보일까봐 믹싱을 하면서 빼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다들 ‘넣자’고 했다. 그래서 ‘넣는 대신 소리를 줄여 달라’고 요구를 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대로 둘 걸’ 싶었다.”
-10·26, 12·12를 다루고 있다 보니 ‘서울의 봄’ ‘남산의 부장들’과 자연스럽게 비교될 것 같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봐줬으면 하나.
“당연히 비교할 것 같다. 두 영화 모두 좋은 작품이고 (흥행 성적이) 부럽다. 관객이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건 없다. 각자 보는 방식과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다르니까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영화는 영화로, 편하게 재미있게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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