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이 유행이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초록색을 입고 싶다.”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에 아울렌티(Gae Aulenti)가 말했다. 아울렌티는 규범에서 벗어나 본인의 길을 걸은 가구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다. 우리에게 ‘피피스트렐로 램프(Pipistrello Lamp)’ 디자이너로 친숙하지만, 이탈리아 건축의 대모로 불릴 만큼 전후 시대에 건축가로 입지를 다진 여성 중 한 명이었다. 1950년대, 남성 건축가가 절대적이었던 시대에도 불구하고 개성과 공예의 부활을 장려하는 신자유운동을 이끌며 여성의 발자취를 깊게 남긴 선구자였다.
밀란의 폴리테크니코(Politecnico)를 졸업하고 당대 아방가르드 건축 저널인 〈카사벨라 Casabella〉 아트 디렉터로 일하는 동안 가에 아울렌티의 디자인 철학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작은 가구 디자인부터 대규모 건축 프로젝트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특정 미학이나 방식에 한정 짓지 않을 것. 아울렌티는 누구나 자신을 특정 스타일로 제한하지 말고 표현의 자유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 짓는 방법을 묻는 사람에게 저는 아무것도 갖추지 말고 책을 꽂을 선반 몇 개와 앉을 쿠션 몇 개만 갖추라고 한다. 지나가는 유행에 맞서고 지속적 가치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더니즘 사조가 활발했던 당시 가에 아울렌티는 기능성과 예술성 사이에 성을 짓고 자신만의 주류를 만들어갔다.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며 오늘날 타임리스 디자인으로 불리는 폴트로노바의 ‘스가르술(Sgarsul)’ 흔들의자, 자노타의 ‘에이프릴(April)’ 접이식 의자, 아르떼미데의 ‘패트로클로(Patroclo)’ 같은 조명과 가구를 탄생시켰다. 1960~1980년대에 아울렌티는 다양한 제품 디자인으로 찬사를 받았는데, 1980년에 선보인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탁월한 건축가의 면모를 입증했다.
1982~1986년 동안 파리 기차역을 현대 미학으로 재탄생시킨 ‘오르세 미술관’이 그의 대표작이다. 이후 퐁피두 센터의 레너베이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국립미술관과 13세기에 지어진 베네치아의 그라시 궁전을 복원하고 미술관으로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유독 현대미술과 인연이 많았던 가에 아울렌티의 건축 작업은 역사적인 공간의 매력을 존중함과 동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으로 유명했다. 아울렌티는 건축가로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감을 즐겼다. “건축은 지속적인 문학과 역사, 예술적 연구를 통해 뒷받침돼야 한다. 건축가는 뿌리가 지하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맥락을 읽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이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방법을 아는 것이야말로 장소에 대한 역사적 재해석이기 때문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