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노름 때문에 집까지 날리고
12살에 어머니의 극단적 시도 목격하기도
개그우먼 이경애는 1984년 KBS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해 코미디 부문 상을 휩쓸며,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같은 데뷔 동기인 김미화와 함께 KBS 여성 코미디언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성공해야 했던 절실한 이유가 있었는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노름에 빠져 집과 차, 통장 등 집안의 모든 재산을 모두 압류당하는 상황에 부닥치기도 했다.
심지어 이경애는 12살 때부터 어머니가 산에서 극단적 시도를 하려는 것을 목격했고, 이에 어머니를 붙들고 빌며 이를 만류했지만 이후에도 그녀는 극단적 시도는 네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위해 중학생 때부터 돈을 벌며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되어야 했고, 심지어 시체 닦는 일이 돈을 많이 준다고 하여 이를 하려고 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성공적인 데뷔 이후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는데, 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며 80년대 당시 한 달에 1억 원의 수익을 올렸지만 이경애에게 돌아오는 돈은 한 푼도 없었다.
그녀가 벌어오는 족족 모든 돈은 매니저 역할을 맡았던 아버지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그는 주식을 하며 전부 날려 버렸다.
이에 이경애는 열이 끓어 정신이 혼미해져도 일을 해야 했고, 10원도 만져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돈을 버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에게 매니저 일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집에서 어머니를 괴롭혔고, 어머니를 위해 이경애는 스스로를 악순환의 굴레에 내던져야 했다.
이후 어머니와 아버지의 몸이 동시에 나빠졌고, 모아둔 돈이 없어 그녀는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며 병원비를 충당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방송에 출연하고 행사를 뛰어도 일주일에 870만 원의 어마어마한 병원비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이에 그녀는 집까지 팔아야 했다.
이경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부모님은 열흘 사이로 함께 세상을 떠났고, 이에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는 상실감 때문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이때가 그녀의 나이가 마흔 직전이었는데, 그제야 자신의 통장을 가지게 되어 직접 출연료를 만져 볼 수 있었다고.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이후 두 번째 결혼에서 인공수정까지 하며 딸을 낳아 행복해지는 듯 보였으나, 남편이 간 이식 수술 이후 몸이 안 좋아져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의 간병에 최선을 다하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그녀는 방송까지 쉬어가며 13년 동안 남편을 돌봐야 했다.
그녀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남편은 급격히 몸이 안 좋아졌고, 다음 해인 2013년 만성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어묵 공장과 즉석떡볶이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코로나가 발발하며 전부 그만두게 됐다고.
이러한 안타까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며 이경애는 자신이 딸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고, 딸이 6살일 때부터 독립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는 어머니 때문에 집에서 나가지 못했다. 독립하려고 하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가지고 협박했다. 내 인생은 전부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딸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렵다”라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에 대해 누리꾼들은 “부디 지금부터라도 행복하세요”, “그때 한 달에 1억 벌었으면 엄청난 건데 그걸 다 날리다니”, “너무 고생 많이 했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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