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라는 관능, 신예진
미국 LA에서 한국 작가이자 한국 전통 원단으로 전통문화를 표현하는 오브제를 만드는 작가로서 살아가는 삶은
우연치 않게 시작한 삶이다. 패션을 전공한 후 한국에서 10년간 패션 비주얼 머천다이저로 일했다. 삶에 변화가 절실하다고 느꼈고, 다음 챕터를 고민하던 중 ‘전통’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늘 새로운 것만 좇는 패션 업계 최전방에서 탈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느리고 꾸준한 것에 이끌렸던 것 같다. 특히 ‘조각보’ 같은 전통문화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결혼과 동시에 LA로 떠났고, 여러 변화를 거듭하면서 낯선 땅에서 정착하고 조각보 작업을 이어갔다. 왜 하필 조각보였나 옛날 사람들은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이어 붙여 보자기를 만들었다. 자투리 천을 즉흥적으로 이어 붙이면 생각지 못한 결과물이 탄생하고, 이는 곧 작품이 됐다. 패턴을 그리거나 일부러 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잘려진 걸 이어 붙여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업에 매료됐다. 자투리 천이 주는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아주 작은 자투리 천도 소중하게 여기고 모아둔다.
빳빳한 모시나 추포 원단으로 달항아리와 호리병 모양을 본뜨고, 여러 자투리 천을 모아 하나의 조각보를 완성하거나 모빌 같은 오브제로 완성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우리나라 원단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재미있다. 과거 의복을 만들 때 계절에 따른 직물의 조직도 신비롭다. 봄에 사용되는 원단은 춘포인데, 이는 모시와 실크, 명주실을 엮은 것이다. 여름에는 모시로 넘어간다. 가을의 추포는 명주와 삼베를 엮어 만든 것으로, 모시보다 질감이 세 배나 더 거칠고 단단하다. 그런 다음 겨울에는 완전한 실크인 명주로 넘어간다. 모두 다른 질감과 다르게 교직된 이 소재들을 서로 섞는 것도 재미있다. 그 과정에서 계절감과 유행을 접목해 보기도 한다. S/S와 F/W를 좇던 버릇을 버리긴 힘들다(웃음). 그러고 보면 나는 닥종이를 옷에 쓰는 걸 좋아했는데, 이처럼 가공하지 않은 소재를 꾸준히 좇은 것 같다. 모시와 추포를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그런 마음이 표현되는 듯하다.
전통적으로 사용되는 ‘보자기’와 예술을 뜻하는 ‘아트’를 결합해 ‘아트보(Artbo)’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특히 모시 달항아리는 리움 스토어에서 합리적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 꽤 놀랍다
전통 사회 모습을 대변하는 것이 보자기라고 생각했고, 보자기에서 비롯된 조각보를 예술 작품으로서 미국에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런 마음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아트보의 기조는 쉬워야 한다는 거다. 예술은 실생활에서도 자주 볼 수 있어야 하고, 활용돼야 한다. 사람들이 곁에 둘 수 있는 오브제는 전시에 걸리는 작품과는 별개로 작업되며, 리움을 시작으로 다양한 갤러리와 뮤지엄 숍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싶다.
오직 천과 바느질로 형태가 잡힌 모형을 만들어갈 때 발견할 수 있는 감각과 취향이 있겠다
지금까지 작업에서 표현했듯이 나는 정반대 성질을 떠올리는 걸 좋아한다. 납작한 평면, 즉 교직이 보이는 원단을 서로 바느질로 이어 붙여 공 모양으로 만들면 볼륨감이 살아난다. 자연적으로 볼륨감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리고 백자인 달항아리를 모시라는 완전 다른 물성의 것으로 만들 때도 마찬가지. 종이접기처럼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의도하지 않은 결과물이 탄생할 때 이 작업을 잇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침선 기술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이 그대로 보존된 문화라고 생각한다. 직접 그 문화를 이끌어나가며 조선시대 여성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을까? 과거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문화를 받아들였을까
침선은 그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이어진 활동이며, 당시 여성들은 예술 활동을 배운 적도 없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침선 기술이 진화한 것이다. 그런 작업을 한 게 대단하고, 그 발자국들이 모두 예술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론 이들의 문화를 이어가는 것이 숙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우려되는 부분도 많고.
어떤 부분을 우려하나
내 창작 활동에 기반이 되는 소재는 한국에서만 만들어지는데, 한국의 한복 시장은 너무 쇠퇴하고 있다. 원단을 구하기도 힘들고,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실도 많아졌다. 기성품을 사용하기에는 한국의 전통성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다. 내게 바느질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님의 친구분이시다. 이영희 선생님께서 작고하시면서 본인이 모아둔 자투리 천을 우리 선생님께 모두 전달하셨고, 그 자투리 천의 일부를 내가 받아올 수 있었다. 그걸 바라볼 때마다 한국 전통 원단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 그 조각들로 작품을 만들어 선보이고, 이영희 선생님을 기념하는 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느리고 꾸준한 바느질에 몰두하며 되찾거나 들여다본 자신의 본능이 있다면
나는 손끝이 끌리는 대로 하는 작업의 감각을 따라가는 편이다. 손끝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내 마음대로 펼쳐지는 작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곤 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급했던 성격이 점점 속도를 늦추더라. 오랜 과정이 필요한 일은 쉽게 회피하거나 도전하지 않았지만, 바느질을 지속하며 마음의 평정심을 얻었다.
패션 업계에서 일하며 늘 트렌드를 좇아왔을 텐데, 그 좇음을 놓을 때 주저하는 마음은 없었나
처음에 조각보 작업에 완전히 올인하지 못했던 건 트렌드에 발 빠르게 적응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달리 먹었다. 전통을 전통으로 풀기보다 트렌드에 발맞춰 표현하기로. 전통적인 쓰임에 집중하지 않고, 현대적 공간에서 오브제이면서도 새롭게 쓰이도록 만들고 싶었다.
신예진 작가의 조각보는 얼마나 다를까
조각보는 ‘한국에서의 나’를 대변한다. 모든 작업에 사연이 담겼다. 가족과 엄마, 결혼, 출산, 한국인으로서의 삶 등. 인간과 삶, 역할을 바탕으로 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그래서 조각과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이 묻어 있다. 조각보를 채우는 작은 천 조각들도 저마다 사연이 있다. 40년의 세월 동안 한복을 만든 장인으로부터 온 한복 천,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색을 가진 골동품 비단, 5대째 내려오는 비단을 짜는 곳에서 만들어진 천을 사용한다. 오래된 물건을 좋아하는 내 취향이 조각 천에서 드러난다.
창작해 보고 싶은 오브제나 창작 활동이 있다면
유년시절의 향수에 대한 작업. 그때 맡았던 향기와 당시 찍은 사진에 담겨 있던 나를 작품을 통해 기억해 보고 싶다. 최근 LA로 이주하고 코로나19 이후 거의 10년 만에 서울에 돌아왔다.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부모님의 이사를 도왔다. 이사를 준비하며 부모님께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내 유년시절 물건들을 직접 정리해야 했다. 사춘기 시절의 일기장, 아기자기한 문구용품,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와 CD들. 즐겨 치던 피아노 책과 초등학교 때부터 모아둔 사진 앨범. 그 후 서울에서의 기억. 그 기억을 회상해 작품으로 만들고,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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