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배우 임세미의 절기요? ‘입추(立秋)’이고 싶어요. 잘 익고 잘 물들고 싶어요. 내 주변 사람들에게, 모든 것들에 잘 물들길 바라요. 아직 성장해야 하지만 잘 빨개졌다가 떨어져야 할 때 잘 떨어지고 싶습니다.”
2005년 드라마 ‘반올림# 2’로 데뷔한 임세미는 어느덧 20년 차 배우가 됐다. 지나온 시간이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주어진 것에 충실하고 매일에 감사하며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무대가 어디든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었고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그렇게 배우 그리고 사람 임세미는 아주 잘 익어가고 있다.
임세미는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2011),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 ‘사랑만 할래’(2014), ‘쇼핑왕 루이’(2016), ‘투깝스’(2017), ‘내 뒤에 테리우스’(2018),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2020) 등과 영화 ‘돈’(2019), ‘어웨이크’(2022) 다수의 작품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연기 내공을 쌓아왔다.
지난해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최악의 악’(2023)과 지난 6월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 등 OTT 플랫폼 작품을 통해 글로벌 시청자와 만났고 2013년 ‘도둑놈 다이어리’를 시작으로 ‘그와 그녀의 목요일’(2014), ‘완벽한 타인’(2021), 지난달 8일 막을 올린 ‘꽃, 별이 지나’까지 연극 무대에도 서는 등 활발한 활약을 이어오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OTT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는 임세미에게 연극은 유독 특별한 의미다. 매체에서 자신이 가진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 써버리는 느낌이라면 무대에서는 꺼낼수록 채워지고 마주할수록 더 나아갈 힘과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임세미가 쉼 없는 작품 활동에도 다시 무대에 오르는 이유다.
“이희준 선배를 통해 연극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선배들의 이야기, 고민거리를 들으면서 내가 가진 것들을 쓰기만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삶에서 충전하거나 인간으로서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연기를 보여줘야 했던 거예요. 부족함을 느끼고 도망치고 싶고 조여오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연극을 하면서 왠지 모르게 채워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할 수 있다면 연극을 계속하고 싶다, 연기를 싫어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되려면 내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제 마음에 자리 잡고 있어요.”
최근에는 ‘꽃, 별이 지나’(작/연출 민준호, 안무 김설진, 제작/기획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창작하는 공간)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꽃, 별이 지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픈 선택에 대해서 인지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힌트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어진 연극으로, 올해 20주년을 맞은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20주년 퍼레이드 세 번째 작품이자 신작이다.
임세미는 미호(김지현·정연·조혜원)의 친구이자 희민(이희준·김대현)의 여자친구 지원 역에 배우 고보결과 더블 캐스팅으로 이름을 올렸다. 지원은 어린 시절 겪은 마음의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임세미는 “누구나 상처는 있다. 각자 느끼는 것으로 채워지길 바랐다”고 했다.
“지원은 내면에 아픔도 있고 몸과 마음도 문제가 많았던 상태로, 치유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온 친구이기 때문에 정상적일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렇게 표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우리는 이 친구의 전사를 다 알지만 관객이 봤을 때 공감할까, 갑작스러운 큰 변화가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걱정도 됐죠. 그런데 이상한 게 맞더라고요. 그리고 관객이 느끼는 것들로 채워지길 바랐어요. 우리도 나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아서 수없이 많은 가면을 쓸 때가 있잖아요. 저도 지원이 같은 면이 없지 않아요. 누구나 상처가 있잖아요. 지원도 그런 인물이었고 몰입하고 집중해서 할 수 있었어요.”
임세미는 사랑에 빠진 풋풋하고 순수한 얼굴부터 상처 가득한 아픈 내면까지 폭넓게 소화하며 깊고 섬세한 열연으로 묵직한 울림을 안긴다. 임세미는 “어렵기도 하고 조심스럽게도 했다”면서 지원에게 진실되게 다가가고자 했던 과정을 떠올렸다.
“친구들이 많이 떠나가고 남아있는 이들이 다시 아픔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창작된 공연이라고 들었어요. 저도 만나고 스쳐 지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연기했어요. 직접 마주치지 않았던 사건과 사고, 아픔과 상처들을 상기하고 꺼내서 쳐다봤어요. 장난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했고 서로가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어요. 어렵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했어요. 다가가는 게 맞을까, 감히 내가 그들을 말할 수 있을까 생각도 많이 했죠. 혹시 내가 또 다른 지원이를 언젠가 혹은 내게서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생각도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온기 있는 포옹밖에 없는 것 같아요.”
‘꽃, 별이 지나’는 탄탄한 대본과 더불어 ‘간다’ 특유의 움직임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배역을 소화하는 것과 동시에 극대화된 신체 움직임으로 꽃이나 나무 등 사물과 두려움과 불안, 무기력함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냥 나는 화분이야’ 하며 멈춰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움직였어요. 빛이 들어오면 지원이로서 나는 ‘미호가 왔나? 보고 싶었는데’라는 생각을 해요. 배역으로서 갖고 있는 상황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남들이 나(지원)에게 줬던 기억들이 나(지원)를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억 속의 엄마, 지나가다 누가 했던 상처의 말들, 열여덟의 너, 지금의 희민이 나를 지배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움직였어요.”
대본에는 ‘미호가 문을 열었을 때 기억들이 쏟아져 나온다’ 정도만 제시돼 있다. 어떻게 쏟아져 나오는 것을 표현해야 할지 정답은 없었고 온전히 배우의 몫이었다. 불안하고 막막하기도 했지만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창작의 맛, 연극의 재미를 느꼈다.
“민준호 연출님도 그렇고 김설진 안무가도 그렇고 배우들끼리 움직여 보고 시도해 보라고 했어요. 만지고 안아보고 해보라고. 그렇게 한 달 반 동안 이건 어떨까 저건 어떨까 확장하고 움직였던 것 같아요. 그때는 불안했는데 연습 과정에서 시도했던 것들이 결국엔 묻어나게 되더라고요. 처음 해 본 경험이라 새롭고 좋았어요. 창작의 맛, 연극의 재미를 느꼈죠.”
함께 무대에서 호흡한 이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도 내비쳤다. 특히 희민 역으로 모든 순간을 함께한 이희준, 김대현과 늘 손을 잡고 기도해 준 진선규에게 특별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희준 선배는 엄청 든든해요. 실수해도 실수가 되지 않게 도와주고 다 받아주거든요. 배역으로서도 믿음이 가게 해줘서 좋고 고마웠어요. 김대현 선배는 이번에 처음 만났는데 엄청 맑아요. 희민 역에 ‘딱’인 사람이에요. 희민을 이 사람만큼 순수하게 할 수 있을까 생각될 정도였죠. 두 선배 모두 놀라운 힘을 지닌 배우예요. 피폐해질 수 있는 순간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늘 행복하게 하자고 했어요. 우울하고 많이 울 수 있지만 그래도 웃자는 마음이었어요. 공연 시작 전에 늘 진선규 선배가 손잡고 기도해 줘요. 안전하게 무대 잘 마칠 수 있게, 오신 분들에게 치유가 되고 삶에 어떤 힘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했어요. 그 시간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그날 공연이) 끝나고 나면 서로 안아주고 사랑한다는 말도 해요.”
무대에 서며 스스로 느끼는 성장과 변화도 있을까. 임세미는 “늘 ‘성장캐’가 되고 싶고 빨리 크고 싶은데 성장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며 겸손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조금은 내려놓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고 했다.
“한 가지 느낀 것은 그냥 해버리면 된다는 마음이 생겼다는 거예요. 현장에서 방어적일 때가 있었거든요. 내가 준비한 게 틀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안감이 쏟아져나오고 집에 갈 때 늘 후회해요. 그런데 이제 그런 마음이 조금은 덜 들어요. 깡다구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 이미 다 프로들이 ‘오케이’한 건데 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게 자만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선배들에게 ‘너무 불안해요, 연기 잘하고 싶어요, 실수했어요’라고 했더니 ‘네가 못했으면 얼마나 못했겠냐, 또 반대로 네가 잘하면 또 얼마나 잘한다고 얼마나 바뀔 거라고 부담을 느끼냐. 그냥 너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해줬어요. 믿고 해보라고. 그런 힘이 공연을 하면서 생긴 것 같아요.”
임세미는 본업인 배우뿐 아니라 채식, 제로웨이스트, 환경보호 활동에도 ‘진심’이다. 개인 유튜브 채널 ‘세미의 절기’에서 절기별로 비건과 제로웨이스트 라이프에 대한 실천을 꾸준히 공유해오고 있다. 임세미는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다”면서 “지금 내가 하는 것들이 지구에도 배우로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삶에 있어서도 좋은 선택이 될 것”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저도 제가 이렇게 될지 몰랐어요. ‘배우는 중간이어야 해, 어디 치우치면 안 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많은 색을 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외국에는 종교적으로도 그렇고 삶에 대한 태도나 옷 스타일이나 정말 다양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배우들이 많잖아요. 주체할 수 없는 각자의 색깔이 넘쳐나는데 왜 표현하면 안 되는 걸까 생각했죠. 그리고 제가 한 생각들이 지구에 나쁜 게 아니에요. 연기하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삶에 있어서도 오히려 좋은 게 아닌가 생각해요.
‘돌풍’ 속 대사들이 제게 아주 잘 쓰이고 있는데 ‘나는 국민을 위해 하는 게 아니다, 내 이기심을 위해 하는 거다, 내가 진절머리가 나서 하는 것’이라는 박동호의 말이 제 삶과 똑같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조카를 위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흙과 땅, 지구를 위해 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나를 위해서구나, 온전히 나의 이기심 때문이구나, 그렇게 행동하는 내가 싫어서라는 걸 알았죠. 물론 실수할 때도 있죠. 실패할 때도 있고요. 그런데 작심삼일이 되지 않아요. 또 하면 돼요. 오늘부터 다시 지키면 돼요. 가던 길을 계속 가면 된다는 마음이에요.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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