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에베 2025 S/S Men’s Show’에 다녀온 직후 만났네요. 인스타그램을 보니 파리라는 도시를 한껏 즐긴 것처럼 보이더군요
파리를 찾은 게 거의 8년 만이더라고요. 출발 전 로에베에서 ‘파리의 낭만을 만끽하세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축하 꽃다발을 보내줬는데, 그 말이 계속 뇌리에 남아 있었어요. ‘낭만’이 우리가 입밖으로 꺼내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니잖아요. 그 표현 그대로 파리의 낭만을 정말 만끽했습니다.
2016년에 이미 해외 컬렉션을 찾았을 정도로 패션계와 옷을 오래동안 가까이에서 봐왔어요. 새삼스럽지만 스타일에 대해 이종석이 갖고 있는 원칙이 궁금한데
바지 밑단과 신발의 조화를 유난히 신경 쓰는 편입니다(웃음). 바지 형태가 신발과 어울리는가, 길이도 세심하게 봐요.
체격이 많이 달라지며 변한 점도 있겠죠
정말 많이 ‘벌크업’했죠. 운동 좀 그만하라는 주변인들의 이야기도 들어요. 사실 이번에 미리 보내주신 질문지를 읽는데, 에디터님의 고뇌가 많이 느껴졌어요. 내가 작품을 하는 상태가 아니니까 인터뷰를 준비하는 입장도 덩달아 어렵구나, 그럼에도 열심히 고민하셨구나 싶었습니다.
들켰군요! 그걸 그래도 또 알아채고 이렇게 말해 주니 고마운데요
대본은 정말 열심히 보고 있어요. 그런데 조심스럽기도, 정말 잘하고 싶기도 하다 보니 더더욱 욕심나는 작품을 기다리게 되네요. 지난 1년간 팬 미팅 투어로 11개 도시에서 팬을 만나며 책임감이 좀 커지기도 했어요. 이 마음에 보답하는 최고의 방법은 결국 연기인데, 올해 두 작품 이상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거든요.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이 인터뷰를 통해 꼭 전하고 싶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나저나 비하인드 영상을 보니 팬 미팅 투어 때 비행기를 탈 때 꼭 김밥 한 줄을 갖고 탄다면서요
루틴처럼 꼭 챙기게 돼요. 전 좀 촌스러워서 배가 안 고파도 기내식을 꼭 먹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비행기에서 주는 라면을 김밥과 먹어야 정말 행복하기 때문에 그래서 챙기는 것도 있어요. 저에게는 보장된 행복입니다.
지난 6월 개봉한 영화 〈설계자〉에서 ‘짝눈이’로 특별 출연해 기분 좋은 놀라움을 안기기도 했어요. 특별 출연은 또 그에 걸맞은 책임감과 부담이 있겠죠
제가 주연인 작품은 선봉에 서야 한다면 특별 출연은 지원군 느낌이잖아요. 덕분에 연기와 현장 자체를 더 즐길 수 있지 않았나 해요.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선배 배우의 연기를 현장에서 모니터할 수 있는 것도 즐거웠고요. 낯선 현장을 말벗도 없이 조용히 관조하는 데서 오는 설렘도 있죠.
막 서른 살이 됐던 2018년부터 세어보니 30대 이종석과 〈엘르〉의 만남이 네 번째더군요. 그때마다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고민을 비춰왔는데 요즘은 어떤가요? 지금의 나이와 좀 친해졌을지
확실히 다방면에서 편해졌어요. 오히려 ‘이 나이도 별거 없구나, 아직 청춘이다’라는 생각도 들고요(웃음). 언젠가부터 머릿속에 복잡한 번뇌가 없어요. 연기적으로나 배우로서 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 생각은 하지만, 전처럼 나를 몰아붙이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래도 확실히 나이가 들었나 보다 싶은 건 “20대 같다” “동안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진짜 기분이 좋다는 것! 예전에는 그런 말에 별 감흥이 없었거든요.
오늘은 정말 20대 같았습니다(웃음). 내향적이고, 변화 없는 일상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새로운 도전과 시도에도 열려 있어요. 서로 상충되는 이런 성향이 같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은 시행착오를 거쳐 나아지잖아요. 그 모든 게 내 경험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도전했던 것 같아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제가 이 산업을, 콘텐츠 만드는 일 자체를 너무 사랑한다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거의 유일한 취미죠. 그러나 어쩔 수 없는 타고난 내향성 때문에 연기를 하는 데 제약이 있다고 느끼거든요. 그렇다면 이 산업에 내가 참여할 수 있는 게 연기 외에 또 뭐가 있을지 찾아보게 되는 거죠. 제작에 대한 관심을 포함해서요.
연기에 제동이 걸려 있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있어요, 원래라면 이 정도까지는 해내야 한다는 구상이 머릿속에는 있는데 제 타고난 육신이 그걸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마인드 컨트롤을 정말 많이 하죠.
박혜련 작가, 박훈정 감독 등 함께 작업했던 이들과 인연을 꾸준히 이어가는 건 배우로서 이종석이 신뢰를 줬기 때문 아닐까요
사실 전 그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제 몫은 해내려고 노력하긴 하지만요.
이종석이 신뢰하게 되는 상대방의 면모는
자기가 맡은 일에 어느 정도의 몰입과 집중력을 보이는가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일에 대해 갖고 있는 확신과 태도, ‘이게 더 좋아’라고 소신 있게 말하는 기조를 가진 사람에게 기꺼이 설득당하는 편이죠. 선택을 내려야 할 입장일 때가 많은데, 누군가가 확신을 갖고 ‘이게 맞다’고 하면 제 의견과 다르더라도 그걸 택해요. 그에 대한 책임도 제가 지고요.
공간에 관심이 많아 카페를 열기도 했습니다. 개인 공간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지만요
지금도 대본 보고 커피를 마시기 위한 아지트가 있어요. 매년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가거든요. 정말 별의별 게 다 있는데 당장 쓸 일이 없더라도 쟁여둬요. 벌레 초음파 퇴치기, 아크릴로 된 와인 테이블…. 전 와인도 안 마시는데 말이죠! 이번에 갔을 때는 원목으로 만든 블루투스 스피커가 주문 제작이 된다고 해서 명함도 받아왔어요. 스틸 소재로 된 멀티탭을 사뒀다가 최근 집들이에서 선물한 적도 있네요.
선물 센스 좋다는 말 좀 듣겠네요
저는 그런데 진짜로 선물 센스가 좋습니다. 그건 진짜 제 장점.
귀여운 것도 장점이고요. 본인 매력으로 귀여움을 꼽은 인터뷰 영상을 봤어요
저 자체가 되게 귀여운 편. 다만 나이를 먹음과 더불어 조금씩 봉인하는 중. 아, 저 오늘 인터뷰 망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얼굴은 좀 붉어진 것 같습니다(웃음). 어린이병원 기부를 비롯해 사회복지에 관한 관심이 꾸준해요. 이종석에게 나눔이란 무엇인가요
마침 아까 말한 집들이가 대체 복무를 하며 만난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의 집들이였어요. 두 커플이 연달아 결혼을 하셨거든요. 현장에 있는 분들이 느끼기에 요즘 가장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중장년층 치과 진료와 법률상담 지원 관련 복지가 이뤄지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서정적인 시나 가사에 끌리는 마음 또한 여전한가요? 〈학교 2013〉 대사로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이 사용돼 큰 사랑을 받았고, 시인과 함께 책을 펴내기도 했죠. 언어가 투박하고 거칠어지는 시기라 이 감성이 더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나태주 시인분과 거의 콤비로 활동했었죠(웃음). 맞아요. 한창 시에 심취했을 때가 있었어요. 요즘은 어떤 것을 보고 깊게 느끼기보다 편안한 상태인 것 같아요. 아, 아름답지는 않지만 최근 저를 사로잡은 속담이 있긴 한데요.
오, 속담이라니 더 궁금한데요
“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이라고,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늘 쓰시던 표현이에요. 걸음이 느리더라도 우직하게 가겠다는 뜻인데, 사실 대단한 의미로 쓰신 건 아니고 할머니가 일 좀 하라고 핀잔을 줄 때 “난 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이여”라고 했다는 게 어머니의 설명이죠(웃음). 그런데 이 말이 되게 인상 깊더라고요. 지금 제가 좀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믿음직한 한 걸음을 보여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엄마도 저한테 왜 작품 안 하냐고, 일 좀 하라고 하시거든요? 그럼 제가 그래요. “엄마, 난 드문드문 걸어도 황소걸음이라니까(웃음).”
본인이 그런 마음 상태라면 문제없죠. 그런데 정말 어떤가요? 촬영을 하지 않을 때 배우의 일과는
일단 눈뜨면 상황버섯 균사체 분말 두 숟갈, 꿀 한 숟갈을 따뜻한 우유에 타서 한 잔 마십니다. 그리고 난 뒤 아침 식사를 하죠. 다이어트를 할 때면 닭 가슴살을 챙기고요. 아닐 때는….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말 안 해도 되는데
… 아, 그럼 하루 루틴을 말할까요! 그 다음에는 운동을 해요. 액션 신을 촬영하며 다쳤던 게 몸이 뻣뻣한 탓인가 싶어 스트레칭과 근력운동을 위해 발레를 시작했어요. 대본이 있다면 살피고, 그 다음에는 누워서 TV를 보죠. 제가 열심히 일한 제 작품을 보는 것에도 행복을 느끼지만, 남이 찍은 재미있는 작품을 보는 게 ‘짱’인 것 같긴 해요. 정말로 소소한 행복입니다.
‘보장된 행복’이 많군요
요즘 또 제가 깜짝 놀란 게 있는데요. 팔도에서 나온 진국설렁탕면! 이걸 냉동 김치만두랑 같이 집에서 먹었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 있어?’ 싶을 정도로 너무 맛있었어요.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데 말할 곳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합니다.
이야기 할 곳이 그리웠군요
예전에는 인터뷰에서 심도 깊고 알맹이 있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는 합의가 은연중에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그런 말을 하는 게 힘들어요. 진국설렁탕면이 맛있고요, 또 더미식에서 출시한 ‘아는 맛보다 더 맛있다’는 비빔면. 그것도 정말 맛있습니다. 인생을 논하고 연기를 논하는 것보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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