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배우 설경구에만 집중한다. 드라마 N차 관람을 부를 만큼 박동호(설경구 분)와 정수진(김희애 분)이 기차게 한 방씩 먹이는 맷집 센 이야기를 전개한 박경수 작가, 김희애 박근형 김홍표 김미숙 김영민 임세미 이해영 전배수 장광 김종구 강상원 등 배우진이 보여준 열연, 숱한 스태프의 노고로 완성된 대형 스크린에 투사돼도 손색없을 미장센, 이 모든 것을 아우른 김용완 연출의 힘…얘기하자면 끝도 없이 극찬할 포인트가 많은 작품 ‘돌풍’이다.
덕분에 어디 가나 드라마 ‘돌풍’(연출 김용완, 극본 박경수, 제작 스튜디오드래곤·팬엔터테인먼트, 채널 넷플릭스) 얘기 꽃이 피었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 모든 얘기를 쓸 재주가 부족해 하나의 인물, 한 명의 배우에 초점을 둔다.
어느 배우가 가장 연기를 잘했느냐를 평하자는 게 아니다. 드라마를 볼 때 어느 한 인물에 내 심장을 옮겨붙이면 극에 더욱 몰입되고 재미와 스릴이 배가 된다고 믿기에, 가능한 1회가 끝나기 전에 마음을 정하려 노력한다. 늘 주연인 것도 아니고 성별을 특정하는 건 더욱 아니다. 이번엔 시작부터 대통령(김홍표 분) 시해를 자행하고 국무총리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는 박동호였다.
박동호는 복잡미묘한 인물이다. 한없이 응원할 수도 끝없이 질책할 수도 없는 인물. 그래서 더욱,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실질적 애증의 관계 속에서 만나는 ‘누구’처럼, 살아있는 인물로 다가온다. 그 누구 가운데 ‘나’도 있다. 현실은 평면적이지 않다. 명분만 지키고 살 수도 없고, 계략과 꼼수로만 사는 것은 제정신의 인간인 이상 스스로 허용하기 어렵다.
박동호 역시 누가 봐도 옳은 ‘정의’만을 움켜쥘 수도 없고. 역사적으로 ‘선’으로 평가될 것이라는 자평 속에 계략과 꼼수를 넘어 악행을 범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빌런이자 자신의 ‘적수’ 정수진이 생각하고 저지르는 것을 뛰어넘어 사고하고 행한다.
이에는 이빨로 응수하고, 방어보다는 선제공격을 취하는 박동호. 명분을 빼고 행위만 보면 수퍼 빌런이다. 어쩌다 이 인물을 마음에 품고 ‘돌풍’을 보기 시작했나, 비탄이 입가에서 새어 나온다. 그래도 역시 인간은, 삶은 ‘의도’와 ‘목적’에 따라 과정과 결과가 다르게 보이나 보다. 밉기보다 측은하고 비난보다 비판, 채찍보다는 박차를 가하며 ‘역사적 대의’를 지지하며 박동호를 사랑했다.
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최고수 악당, 소년의 심장으로 악마의 칼날을 휘두르는 박동호를 지지하고 아낄 수 있게 한 것의 8할은 배우 설경구다. 정확히 말하면 눈 씻고 찾아봐도 ‘인물의 열기가 새어 나갈 구멍’을 찾을 수 없는 설경구의 연기 밀도다.
‘돌풍’ 박동호를 연기하는 설경구를 보는데 ‘연기의 밀도’라는 키워드가 매직아이처럼 마음 위로 떠올랐다. ‘아, 진짜 지독하게 촘촘히 연기하네!’로 시작된 생각은, ‘왜 그토록 빡빡하고 빽빽해야 했을까’로 이어졌다. 배우 설경구가 연기 잘하는 거야 정평이 난 사실이고, 떼로는 미친놈처럼 뜨겁게 때로는 나사 하나 잃어버린 것처럼 헐렁하게 때로는 나이를 잊은 ‘지천명 아이돌’처럼 섹시하게 연기하는데, 이번엔 밀도인 이유가 있을 터이다.
드라마를 보며, 박동호를 지켜보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앞서 말했듯 한 손에는 명분을 틀어쥐고 다른 손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청산의 칼날을 휘두르는 인물, 그의 칼춤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악행이 아니라 역사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읽히기 위해선 조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하물며 인간미조차 박동호에게는 상대의 공격을 허하는 허점이 될 수 있고, 보는 우리가 그를 비난하는 바늘 끝을 찔러넣을 구멍이 될 수 있다.
배우 설경구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함께 앙다문 어금니가 으스러지고 부릅뜬 눈에 핏발이 설 만큼, 빈틈없이 응축된 고밀도 연기를 행했다. 덕분에, 안일한 안정과 보신을 거부하고 스스로 대한민국 정치판과 한국 현대사의 돌풍을 자처한 인물의 진심과 명분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설경구는 언제까지 자신의 연기를 스스로 갱신할까, 그 끝이 가늠되지 않는 배우가 안기는 즐거움이 큰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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