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님! 제 차를 타시지요!”
1997년 봄 어느 늦은 밤 서울 경의선 신촌역 앞. ‘경기’ 번호판을 단 택시들이 길게 줄지어 선 채 일산과 파주 등 시외로 향하는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에 취한 한 중년의 사내를 발견한 몇몇 택시기사들이 모여들었다. “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모양새가 이미 아는 얼굴임을 알려주었다.
택시기사들은 말 그대로, 깍듯하게 중년의 사내를 맞았다.
“누군지 아세요?”라고 묻자 누군가 “아, 김 선생님도 몰라 보면 안 되죠”라고 말했다. “그럼 댁이 어딘지도…”라는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잘 모셔다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가세요”라며 기자의 등을 떠밀었다.
중년의 사내는 서울 대학로를 상징하던 소극장 학전의 김민기 대표였다.
당시 김 대표는 ‘지하철 1호선’에 이어 또 한 편의 록뮤지컬 ‘모스키토’를 준비 중이었다.
공연을 취재 영역으로 담당하며 ‘모스키토’ 연습장을 찾았다. 연습이 끝난 뒤 김 대표는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기자를 붙들었다.
김치전 등 소박한 안주에 막걸리잔을 주고 받았다. 김 대표와 함께한 몇몇 배우가 자리를 떠난 뒤 얼큰하게 취한 김 대표와 함께 택시에 올랐다.
그는 기자 초년생의 일상을 이것저것 나지막한 목소리로 캐물어가며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려주었다.
신촌역 앞에 도착한 택시에서 그를 부축하며 내리자 그에게 모여든 택시기사들. 그들의 호칭과 사람 대하는 태도는 단순한 단골 승객을 향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따뜻한 눈망울로 자신들의 시대와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던 한 예술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표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그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세상의 애정에 무심했고, 오히려 ‘뒷것’의 자리에 머물기를 바랐다.
무대 위에 오르는 배우와 뮤지션 등 아티스트들을 ‘앞것’이라 부르며 자신은 그들에게 그 무대를 펼쳐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고, 올해 3월 선보인 SBS 다큐멘터멘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는 말해주었다.
그런 그를 한때 세상은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물감값을 보태기 위해 고교동창인 김영세(전 이노디자인 대표)와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의 포크 듀오 ‘도비두’를 결성했다. 서울 명동의 서울YWCA가 청년들을 위해 문을 열어준 문화공간 청개구리의 집을 드나들며 노래했다.
그 시절 재수생 양희은을 만났고, 세상에 내놓은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이었다.
김민기는 1971년 자신의 독집 앨범 ‘김민기’를 선보였다. ‘아침이슬’과 함께 ‘친구’ 등이 실린 음반은 당대 ‘팝송’을 번안한 노래가 넘쳐나는 시대에 오롯한 문학적 향취로 가득한 자작곡을 가득 담은 앨범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당시 앨범과 노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의 극심한 사회적 통제와 단속은 이를 ‘불온한 것’으로 바라보았다. 불과 1년 전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던 노래 ‘아침이슬’은 1972년 10월 유신과 함께 방송에서 부르지도, 듣지도 못하는 노래로 금지당했다.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를 부르려다 경찰에 연행되기까지 한 그는, 원치 않았지만, 당대 저항의 또 다른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당국의 체포와 구금의 탄압 속에서 자신을 구타하는 보안사 조사관들을 바라보며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싶어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던(2024년 5월6일 한겨레 ‘김영희 칼럼’) 그는 오랜 시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날, 달동네 공공어린이집 설립을 위한 모금공연에서 다시 노래했다.
그만큼 노래는 그에게 절박한 힘이었는지 모른다.
1991년 소극장 학전의 문을 열기 위해 그는 녹음스튜디오의 마이크 앞에 섰다.
4장의 앨범으로 구성한 ‘김민기 전집’을 내놓으며 그 선불금으로 180석 규모의 소극장 학전을 마련했다.
1994년 초연한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시작으로 김민기는, 이제 다 알다시피, 숱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 무대를 통해 설경구, 김윤석, 장현성, 황정민, 조승우 등 스타들이 탄생했다.
이를 통해 그는 서울 대학로 소극장 문화를 이끈 또 한 사람의 문화기획자로 자리매김했다.
가수 김광석은 학전에서 무려 1000회 콘서트를 마칠 수 있었고, 작곡가 겸 가수 노영심과 윤도현 등도 자신들의 무대를 꾸몄다. 소극장 라이브 콘서트가 대중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한 커다란 계기도 바로 그들의 무대였다.
김민기는 2000년대 들어서서는 ‘아빠 얼굴 예쁘네요’ 등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무대에도 힘을 쏟았다. “돈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돈을 벌면 끝내 못할 것 같아서” 아낌없이 투자했다.
김민기는 그렇게 묵묵히 ‘앞것’들의 무대를 열어주며 ‘뒷것’의 자리만을 지켰다.
암울한 시대에 묵묵히 맞서면서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 음유시인,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한 시대의 문화적 흐름을 이끌었던 탁월한 기획자.
하지만 기자에게 김민기는 다른 무엇보다, 소박한 막걸리 한 잔에 취해서도 새카맣게 어린 청년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공감의 고개를 끄덕여 천진난만해 보이는 눈웃음을 내어주던 ‘어른’으로 남아 있다.
이 시대 또 한 분의 ‘어른’이 그렇게 세상과 이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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