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과 트로트를 접목해
트로트의 유행을 이끈 송가인,
그가 무명 시절을 견뎌낸 방법은?
국악을 전공하다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며 국악 트로트의 독보적 1인자가 된 송가인.
트로트의 유행을 선도하는 대표 가수가 되며 지금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나, 그에게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무명 시절이 있었다.
송가인의 어머니는 국가무형문화재 명인이고 작은 오빠는 유명한 아쟁 연주자로, 송가인은 국악인 집안에서 자라났다.
어린 시절부터 국악과 함께 자라며 자연스럽게 국악을 전공했으나 전국노래자랑 진도 편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으며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게 되었다.
이후 2012년 ‘산바람아 강바람아’, ‘사랑가’를 발표하며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지만 여타 트로트 가수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무명 시절을 견뎌야 했다.
2019년 ‘내일은 미스트롯’에 출연해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 전까지 송가인은 7년이라는 무명 시절을 보냈다.
송가인은 자신의 무명 시절에 대하여 상세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으나,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 무대를 누비거나 대기실도 없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서러운 일도 겪었다고 말한 바 있다.
40만 원어치 재료 사서 비녀 만들어 팔았던 송가인
한편 송가인은 한 교양 프로그램에 출연해 무명 시절 어떻게 생활고를 견뎠는지 이야기하기도 했다.
송가인은 “(무명 시절 동안) 노래를 아무리 연습해도 부를 무대가 없었다”면서 “‘그냥 국악이나 할 걸’이라는 생각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무대가 한 달에 1~2번 밖에 없을 때도 있었고 페이 안 주는 것도 많았다”며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가 어려워 비녀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국악 전공자 시절의 기억을 토대로 40만 원어치의 재료를 사 비녀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송가인.
그는 “제가 만든 비녀가 다행히 인기가 꽤 많았다”며 “그렇게 만든 비녀로 한 달에 100~200만 원을 벌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밤을 새워 새벽 5시까지 비녀를 만들면서도 ’10년 뒤에는 좀 더 인기가 생기겠지’와 같은 생각을 했다고 덧붙여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지난 5월 송가인은 자신의 무명 시절 힘이 되어준 소속사 대표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할 말은 많지만 생략하겠다”며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라는 해시태그를 덧붙였다.
외롭고도 비참했던 무명 시절을 견디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송가인의 사연은 많은 네티즌에게 감동을 안겼다.
송가인의 사연을 접한 네티즌들은 “그래도 손재주가 정말 좋았나 보네”, “뚝심 있게 트로트 가수가 되다니 대단하다”, “그때 포기하지 않아서 너무 다행” 등의 반응을 보였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