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어느 때보다 큰 화제와 성원 속에 치뤄진 ‘2024 서울국제도서전’! 그 중에서도 현장에서 뜨거운 사랑과 호응을 얻었던 프로그램이 있었으니, 바로 엘르보이스 강연이었습니다.
이번 도서전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이었던 ‘후이늠(Houyhnhnm: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나라. 평화롭고 질서를 중요시해 이상적으로 여겨지나 이면이 있는 장소)’을 엘르보이스 식으로 해석한 강연의 주제는 바로 ‘여성의 삶에서 평화를 지키는 방법’!
‘엘르보이스’의 첫 도서전 참여였던 2022년부터 3년 연속 엘르보이스 강연과 함께 해주신 임현주 아나운서의 진행과 함께 문우리, 에리카, 황선우, 황효진(가나다 순) 네 명의 여성이 자리에 함께했는데요. “평화의 층위라는 게 무척 다채롭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한 만큼 다양한 분야의 분들을 모셨다”라는 임현주 아나운서의 시작하는 말 그대로 평화라는 상태를 둘러싼 각기 다른 이야기들이 강연을 한껏 풍부하게 만들었습니다.
강연의 포문은 운동으로 다져진 멋진 근육을 자랑하는 여성전용운동센터 샤크짐의 에리카 공동대표가 열었습니다. 근력을 기를 것을 촉구하는 에세이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펴낸 그는 우리가 처한 기본적인 상태는 ‘평화와 질서’보다는 ‘혼돈과 폭력’에 가까움을 지적하며 평화를 쟁취하는 데 필요한 공격성을 키울 것을 강조했어요.
“한국같이 고도로 발달한 문명사회에서는 명확한 계급사회의 한계 대신 일상에 스며든 불합리한 대우가 존재합니다.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발언이나, 거부하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당하는 상황에 처할 때. 나의 사회적 위치를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고 생각해요. 그런 상황에서 맞기보다는 공격 가능한 상태가 되는 것, 자주적인 공격성을 갖기 위해 우리에게는 근력 운동이 필요합니다”
몰상식한 상황에 처한 경험이 분노나 좌절의 에피소드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그걸 뛰어넘는 공격성을 자연스레 품는 것, 이때의 공격성은 물리적인 타격이 아닌 ‘정신적인 상태’이며 고강도의 근력운동이 이런 건강한 공격성을 갖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과학적인 근거를 통해 이야기했는데요. 왜소한 체구였던 샤크짐의 한 회원이 꾸준한 근력운동을 통해 갖게 된 마인드의 변화에 대한 예시로 공감을 사기도 했습니다. “뇌도 몸이다! 평화를 위해 운동을 하자!”라는 에리카 대표의 관점은 새롭고도 명료했죠.
다양한 직무에 근무하는 20대 후반~40대 초반의 여성들이 모여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멤버십 커뮤니티 ‘뉴그라운드’를 2021년부터 운영 중인 황효진 대표의 화두는 ‘연결감이 선사하는 일에서의 평화’였습니다.
일터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여러가지 문제들. 성차별과 번아웃, 능력주의와 불안정한 노동환경, 페미니즘 백래시, 동료의 부재… 외롭고 힘들게 마드는 이런 고민 속에서도 일터에서는 사적인 고민을 꺼내놓기 터부시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단순한 업무 회고가 아닌, 내가 일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털어놓으며 일터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커뮤니티 안에서 꾸준히 나누며 명확한 관점을 갖고 자신을 돌아보고 갱신하는 것이 목표 의식을 뉴그라운드 멤버들은 공유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일 이야기만 했다면 차츰 그냥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서로의 일상에 평화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기도 했다는데요. 그러기 위해서 다름을 인정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황효진 대표는 말합니다. “각자가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 안에서 여성이자 페미니스트로서 일하고 사는 방식을 같이 배우려고 하지만 사실 만나보면 우리는 서로 너무 다른 사람들이거든요. 그 다름을 전제로 하되, 문제의식을 토대로 커뮤니티 바깥으로 시선을 돌려보려고 해요. 우리의 평화만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얻어낸 평화를 삶과 일을 통해 실천하는 거죠.”
다음 순서는 멘탈케어 스타트업 포티파이의 문우리 대표로 이어졌어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 근무하다가 창업을 한 문우리 대표는 ‘우리의 삶은 태풍과도 같다. 그리고 가장 조용한 태풍의 핵에 ‘내’가 있음을, 나다움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
“사람들은 내 능력을 수치화 했을 때 평균보다 부족한 부분에 신경을 쓰고 그 부분을 메우려 애써요. 하지만 그보다는 장점을 키우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죠. 우리는 가장 나 다울 때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아름답게 빛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모습을 가진 사람인지를 알 때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고요” 나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사람들의 ‘그 다움’ 또한 알 때 서로 보완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법 또한 알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가진 기질에 맞춰 전공과 삶의 경로를 여러 번 바꾸며 ‘나답게’ 도전해 온 문우리 대표가 스스로 쌓아온 드라마틱한 이력과 고백은 나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득력을 더했습니다.
건강한 공격성, 연결감, 나 다움을 찾는 것을 통한 평화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 강연주자인 황선우 작가의 차례에서 한층 더 넓은 이야기로 뻗어 나갔습니다. 개인의 일상의 평화는 어떤 면에서 영위하기 쉽지만 그것이 진정한 평화인 것인가하는 물음이었죠.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으며 나의 평화를 지킨다고 해도 뉴스나 SNS에는 접하고 싶지 않은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세상의 소음들은 우리의 평화를 항상 방해하죠. 그렇다고 귀를 막고,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기만 하면 될까요? 그렇게 내부로 침잠하고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평화는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요?” 담벼락 너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고,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그 옆의 저택에서 아이들과 정원을 가꾸며 하루하루 흘러가는 나치 장교 가족의 일상을 담은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평화로운 풍경 스틸이 사실은 절대 평화롭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삶을 회피해서는 평화를 찾을 수 없다’는 또다른 영화 〈디 아워스〉의 대사처럼 “누군가는 왜 그런 싸움을 하는지, 왜 누군가는 평화롭지 않은 방식으로 소음을 내고 있는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몇 가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에는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순응하는 방식의 평화가 아닌 능동하는 방식의 평화를 지향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황선우 작가의 이야기는 ‘평화’의 범주를 한번 더 확장했습니다.
한 시간 반의 강연 시간 중 한 시간 넘는 시간이 훌쩍 흘러 미리 준비한 사전 질문 대신, 임현주 아나운서의 노련한 주도 하에 현장 질의응답 순서로 곧바로 이어졌는데요. 뜨거운 질문의 열기 속에서, 두 가지 유의미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공유할게요!
에리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라는 건 원래 없습니다. 일단 해보세요. 실행에 옮기고 가지치기를 하면서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해 가면 됩니다.
문우리 가치관과 삶의 선택에 대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판단하지 말고 존중하는 한 사람이 되어 주세요. 실제로 정신과 진료를 하며 환자들을 만났을 때 ‘나를 그대로 바라봐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그 환자의 예후가 좋은 경우를 여러 번 목격했어요. 힘든 일에 처한 누군가에게 ‘그 곁의 한 사람’이 되어주세요.
황선우 얼마전 평소에도 혼잡한 일방통행인 동네 골목길이 자동차 경적 소리를 잘 듣지 못한 폐지수거하는 리어카 노인의 등장으로 더욱 혼잡해진 적 있었어요. 그때 길을 지나던 한 20대 청년이 현장에 바로 뛰어들어 노인의 이동을 돕는 동시에 차들에게 연신 사과를 하더라고요. 자기의 바운더리를 기꺼이 깨고 나와서 섞이는 것, 누군가를 대신해 사과하고 귀찮음을 감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순간이었죠.
문우리 내가 누가 봐도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했는데 불편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불편함은 그 사람의 몫인 거예요. 내가 믿는 일을 할 때는 내 중심을 잡는 것, 미움받을 용기를 갖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황효진 조직이라고 하면 흔히 회사나 건물을 떠올리지만 사실 사람으로 구성된 것이거든요. 우리는 모두 약점과, 소수자성을 가진 개인들로서 함께할 수 있어요. 너무 개인화 되어 있지 말고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고, 바꾸려고 하는 가능성을 품어 보세요. 작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연대니까요.
에리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가정하고 고민하고, 그때의 나를 미리 예상해 검열하지 마세요. 이렇게 미리 걱정하시는 분이면 아무리 함부로 행동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이미 남을 배려하는 상황일 거예요. 심지어 그게 좋은 의도라면 더욱 자신을 믿고 신념대로 움직여 보세요.
한 시간 반을 ‘꽉꽉 ‘채운 강연이 끝날 무렵 무대 위의 다섯 여성, 그리고 객석에 앉아 혹은 강연장 주변에 서서 강연에 귀 기울인 여성들 사이에 끈끈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백래시, 나날이 늘어나는 교제살인과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비롯해 우리를 괴롭히는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 속에서 ‘평화롭지 않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지만, 그 한편으로는 나의 평화만 생각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는 거대한 연대 의식이 이 안에 공유되고 있었죠. 그리고 이런 고민들에 대해서 편하게 발화할 수 있는 자리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다는 사실도요. 6월 28일, 오후 6시 30분. 강연이 펼쳐진 코엑스 C홀에는 임현주 아나운서의 마지막 말이 박수와 함께 힘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이제 우리 조금 덜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가서, 함께 고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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