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호와 정수진의 성찰 없는 분노는 그들 모두를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나의 분노는 정당한가?’ 그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부끄러워하며 써 내려갔습니다.”
박경수 작가가 ‘돌풍’의 시작점을 공개했다.
박 작가가 극본을 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연출 김용완)이 지난달 28일 공개된 가운데, 적나라하게 드러난 정경유착의 부패 권력과 이를 처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고 “몰락하는 인간”의 초상화를 그려내며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이 작품은 지금의 넷플릭스 초석을 다진 미국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를 연상케 하는 등장인물들의 수 싸움이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SBS 드라마 ‘추적자 더 체이서'(2012년) ‘황금의 제국'(2013년) ‘펀치'(2014년)를 통해 ‘권력 3부작’을 완성했던 박 작가는 ‘돌풍’을 통해 몰입감 넘치는 정치 스릴러를 완성하며 “역시 박경수”라는 호평도 이어지고 있다.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강렬한 사건으로 ‘돌풍’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창조해낸 박경수 작가가 ‘돌풍’의 궁금증에 대해 답했다.
● 박경수 작가가 집필한 ‘돌풍’이 ‘돌풍’인 이유
‘돌풍’은 세상을 뒤엎기 위해 현직 대통령 시해를 결심한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와 그를 막아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 사이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박 작가는 넷플릭스를 통해 ‘돌풍’에 대해 “박동호의 ‘위험한 신념’과 정수진의 ‘타락한 신념’이 정면충돌해 대한민국 정치판을 무대로 펼쳐지는 활극”이라고 소개했다.
“‘돌풍’은 이미 낡아버린 과거가 현실을 지배하고, 미래의 씨앗은 보이지 않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오늘의 현실을 ‘리셋’하고 싶은 갈망에서 시작한 작품입니다.”
드라마의 제목을 ‘돌풍’으로 붙인 이유에 대해 박 작가는 “극중 서기태의 대사는 제 진심”이라고 밝혔다.
박동호의 친구이자, 박동호가 세상을 뒤엎으려고 결심하게 만든 출발인 정치인 서기태(박경찬)는 ‘꿈이 뭐냐’는 질문에 “돌풍”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 다 쓸어버리고“라고 답한다.
‘돌풍’은 자신의 신념과 욕망, 목적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인물들의 대립부터 계속해서 뒤바뀌는 공수(공격과 수비)의 대결과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강렬한 사건이 연이어 벌어지며 제목 그대로 돌풍이 몰아치는 전개를 선보인다.
박 작가는 “항상 이번 회가 마지막 회라고 생각하고 대본을 쓴다”고 말했다. 다음을 염두에 두고 쓰면, 주인공이 빠져나올 수 있을만한 상황에서 멈추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주인공을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집어넣고, 그 회를 끝낸다. 도저히 방법이 없지만 찾고 또 찾다 보면 또다시 활로가 생긴다”면서 “제가 쓴 작품의 다음 회가 궁금한 이유는 작가도 다음 회를 모르고 그 회의 엔딩을 쓰기 때문”이라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가 펼쳐지는 이유를 짚었다.
● “권력이 아니라 몰락을 그린다”
‘권력 3부작’에 이어 정치권을 배경으로 ‘권력’이라는 소재를 다시 한번 끌고 온 것에 대해 박 작가는 “사람들은 제가 ‘권력을 비판하는 작품’을 쓴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런 작품을 쓰겠다 의도하고 시작한 적은 없다”고 말문을 열었다.
“저의 작품에 권력 비판적 요소가 있다면, 제 마음을 울리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21세기 대한민국이 불합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대와 국가와 무대와 작업은 배경일 뿐. 제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오직 그 인간의 본질입니다.”
“사회를 고발한다는 말에 조금의 거부감이 있다”는 박 작가는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신이 사는 세상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 있다. 이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저의 책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불합리는 내 안의 악마가 만들거나, 침묵하거나, 묵인한 것”이라며 “나의 침묵으로 만들어진 불합리한 세상을 나의 주인공이 살아가기 때문에 아프다”고 반성했다.
‘돌풍’이 앞선 ‘추적자 더 체이서’ ‘황금의 제국’ ‘펀치’와 차별화되는 지점에 대해 “세 작품은 약자를 짓누르는 강자들에 대한 분노의 정서가 깔려 있다”면서 “‘돌풍’은 ‘나의 분노는 정당한가?’라는 성찰에서 시작했다.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가 한 번쯤 자신의 분노는 정당한지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너무나 고마운 일”이라고도 했다.
“권력이 아니라 몰락을 그린다”던 박 작가는 ‘추적자 더 체이서’의 강동윤(김상중) ‘황금의 제국’ 장태주(고수) ‘펀치’의 박정환(김래원)에 대해 “불가능한 꿈을 꾸었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질주하다가 몰락하는 자들”이라면서 “작가로서 ‘이카루스적 인간’을 좋아한다. 안전한 삶을 포기하고, 불온한 꿈을 꾸는 자들. 하지만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기에 끝내 몰락하는 자들을 앞으로도 더욱 깊이 있게 그려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정수진은 나와 닮아…욕망보다 위험한 신념”
박 작가가 그린 박동호 역시 “몰락하는 인물”에 속한다. 그는 부패 권력을 뿌리 뽑기 위해서 ‘대통령 시해’조차 불사하며 끝까지 내달린다.
“박동호는 ‘위험한 신념’을 가졌어요.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포기한 자가 주어진 시간 동안 세상을 청소하고 국가를 포맷하려는 그 숨 가쁜 진격의 템포를 통해 현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메시지라도 던질 수 있길 바랐습니다.”
민주주의를 염원한 민주 투사였지만, 시간이 흘러 재벌가와 결탁한 정수진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타락한 신념’을 가진 정치가다. 이런 정수진에 대해 박 작가는 “나의 모습과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박 작가는 “저의 흔적이 진하게 배어있는 정수진은 제가 가장 아프게 그린 인물”이라면서 “저는 욕망보다 신념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욕망은 법으로 통제할 수 있지만, 신념은 통제마저 어렵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불타는 내면을 차가운 호흡으로 표현하며 장면을 장악하는 두 배우의 연기 내공을 알기에 전적으로 신뢰했어요. 저의 신뢰보다 몇 배나 더 나은 연기를 보여준 두 배우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넷플릭스와 처음으로 협업해 전 세계 190여 개국에 ‘돌풍’이 소개되는 것에 대해 박 작가는 “유럽의 어느 노인이, 아프리카의 어느 청년이, 미국의 어느 학생도 ‘돌풍’을 볼 수 있다 생각하니 많이 두렵고 조금은 설레는 마음”이라고 고백했다.
“내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는 남의 마음도 울린다는 생각으로 각본을 써 왔다”던 그는 “한국 시청자는 물론, 같은 시대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울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귓속말'(2017년) 이후 7년 만에 신작을 공개한 박 작가는 마지막으로 “더 열심히 살고, 더 열심히 쓰겠다”고 다짐했다.
“다음 작품은 ‘돌풍’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공개되도록 속도를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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