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드래곤의 목격담이 쏟아질 장소가 대전광역시에 있는 국내 최고의 과학기술 전문대학이 될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이 있었을까? 6월 5일 예정된 특강을 앞두고 캠퍼스를 찾은 그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포착한 인스타그램 스토리나 사진에는 하나같이 ‘지디님 영접’ 같은 애정 어린 멘트가 붙어 있었다. 그렇게 SNS 실시간 트렌드를 점령한 것에 이어 지드래곤은 특강 당일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사실을 공표했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초빙 교수이자 글로벌 앰배서더로 임명된 것이다. 권지용 교수님이라니! 문득 세계 최대의 가전 · IT 산업박람회인 ‘CES 2024’ 참석차 LA에 다녀왔다는 올해 1월의 뉴스가 떠올랐다. 그래, 지드래곤은 다 계획이 있구나. SNS 목격담에 버금가는 환대와 활기는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을까?
“제게도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잖아요.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처음 등교할 때처럼 설레기도 했어요. 기계공학과를 둘러볼 때는 신기한 게 너무 많아서 놀이동산에 온 기분이었죠.” 놀이동산이라고 표현했지만, 치열한 에너지 또한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카이스트는 자신의 분야를 열정적으로 탐구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에요. 창작자들처럼 학업과 일상의 경계가 불분명한 채로 연구실과 기숙사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요. 연습실에서 혼자 고민하고 알아가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열심히 탐구하던 예전의 제 모습과 이 학생들의 모습이 어쩌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세상에 덜 알려진 카이스트의 연구 업적과 자랑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이야기하는 모습은 이미 자부심 가득한 신임 교수의 면모로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화보 촬영을 위한 지하의 스튜디오다. 컬러플하게 변주된 샤넬의 트위드, 가장 최신의 샤넬 공방 컬렉션 여성복을 젠더리스하게 믹스매치한 모습. 지드래곤다운 모든 요소가 현실화된 것 같았던 이날의 주인공은 정작 약간의 부담을 가졌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거의 1년 만의 촬영이다 보니 괜히 촬영 시안도 열심히 보게 되더라고요. 어제 바나나 두 개만 먹었는데 이런 ‘식단’ 비슷한 일을 한 것도 처음이네요. 슬슬 배고픈데요.” 식단과 허기. 지극히 당연하게 도출된 단어임에도 이런 일상적인 모습이 포착될 때 이상한 반가움과 균열을 느끼게 하는 구석이 그에게는 있다.
예를 들어 넓어진 어깨와 팔의 굴곡을 보며 신체운동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물었을 때. 소소하나마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줄 일상의 규칙이 필요했고, ‘늦었다 혹은 오늘 운동에 못 갔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더라는 답변이 돌아올 때. 육체 단련과 정신의 상관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답변을 짐작했던 내 쪽이 다소 머쓱해지는 식이다. 독서 애호가로서 읽을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질문에 SNS에서 발견한 구절에 끌려 검색해 보기도 하고, 책이나 영화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계정을 참조하기도 한다는 정석적인 답변이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입에서 교보문고나 로켓 배송 같은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런 때 찾아오는 이 유쾌한 괴리감은 그를 도통 내버려두지 않은 미디어가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한 이미지 때문일까? 혹은 수많은 ‘최초’ ‘최고’의 기록을 탑처럼 쌓아 올려온 자를 대할 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감정일까.
새삼스럽지만 프런티어로서 그가 세워온 기록을 몇 가지만 언급하겠다. 지드래곤은 최초로 앨범 수록곡 전체를 국내 음원 차트에 ‘줄 세우기’를 해낸 주인공이고(2009년), 최초로 빌보드 월드 앨범 아티스트 연간 차트에 이름을 올린 한국 가수이며(2013년), 최초로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주최한 대중 예술가이자(2015년), 최초로 샤넬의 글로벌 앰배서더가 된 아시아 남성이다(2016년). 분야를 넘나들며 ‘빌보드’ ‘글로벌’ 같은 단어를 섭렵해 온 틈새에는 한결 친근한 기록도 있다. 역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주최해 온 가요제에 3회 연속 참여한 유일한 아티스트라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종종 잊히곤 하지만, 이처럼 지드래곤은 무대를 벗어난 순간에도 대중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최초의 슈퍼스타이자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원대한 기록 이후 혼자만의 고요한 삶으로 침잠할 수 있었음에도 지드래곤은 대중과 연결되려는 의지를 감춘 적 없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용기 있게 미디어를 활용해 정면 돌파하는 법도 안다. 그런 호기심과 의지를 가진 인간에게만 보이는 비전이 그를 다양한 분야에서 가장 앞서나갈 수 있게 이끄는 것일 수도.
“이왕 하는 일이면 구태의연한 것보다 새로운 것, 낯선 것에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창작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존재해요. 그 분야도 다양하죠. 음악은 제 전문 분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기꺼이 빌려오는 게 맞다고 믿어요. 그렇게 할 때 수준 자체가 높아짐은 물론, 사람들 또한 그 결과물을 한결 쉽게 수용하는 것 같거든요.” 당연하게도 음악은 지드래곤의 가장 강렬한 자기표현이자 세상과의 연결점이다. 여러 소문과 억측 속에서도 앨범 작업을 절대로 놓지 않고 골몰 중인 것에서 짐작 가능하듯 말이다. ‘하늘에서 선물 상자가 떨어진다면 어떤 게 들어 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완성된 앨범”이라고 답할 정도로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갈증을 감추지 않는 아티스트의 모습만큼 그의 음악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위로이자 안심이 되는 게 있을까?
“앨범 작업과 관련해 지난해에는 느낌표에 가까운 답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물음표에 가까워졌어요. ‘하면 돼! 해야지!’ 같은 확신에서 ‘지용아, 할 수 있지?’가 됐달까요. 지금은 확실히 오르막길에 있는 것 같지만, 중요한 건 어쨌든 ‘길은 언제든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될 거고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요? 지금은 제가 오히려 격려를 받고 싶은 걸요.” 약간의 엄살과 진심이 한데 섞인 답변에서 ‘어쨌든 길은 통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을 선택적으로 믿기로 한다.
문득 든 소소한 궁금증. 빅뱅 멤버끼리 있을 때 지금의 K팝이나 후배 아티스트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할까? 지난해 앨범을 발표한 태양의 솔로 활동에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낸 지드래곤은 올봄 대성의 팬 미팅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저희 멤버들이요? 아, 이제 세 명이구나.” 스치듯 지나간 말에 괜히 마음이 저린 것도 잠시. “아뇨. 저희끼리 지금의 신(Scene)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아요. 당연히 자연스럽게 들리는 주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나누지만요. 후배들 입장에서도 저희는 좀 대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동안 인터뷰로 만났던 K팝 보이 그룹 멤버 중 빅뱅과 당신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지, 어린 시절 찾았던 구체적인 콘서트장의 기억을 꺼낸 이들이나 최근 데뷔한 그룹의 신곡이 특정 시기 빅뱅의 바이브를 얼마나 닮았는지 열변을 토하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고 대신 샤넬과 이토록 오래 단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를 물었다. 그 답변 또한 수많은 브랜드의 앰배서더 열풍에 동참 중인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10년 전 발표한 솔로곡의 강렬한 후렴구 ‘영원한 건 절대 없어’는 어느덧 사람들에게 밈(Meme)이자 정언이 됐다. 그 노래를 부른 당사자는 영원한 것은 정말 절대로 없다고 믿을까? “그 부분은 제가 쓴 가사는 아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진실을 상당히 일찍 알았나 싶기는 하네요.” 슬쩍 웃으며 답하는 그를 보며 말한다. 그러나 그 가사가 지금까지 생명력을 얻은 건 당신이 그 곡을 그런 태도로 불렀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가진 기본적인 유한성을 생각하면 영원이라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개념이지만….” 말은 이어진다. “그럼에도 어떤 것들은 영원하다고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랑, 믿음, 우정같이 일반적인 가치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이해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영원한 것이 좋은 상태냐고 묻는다면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좋은 것도 계속 좋을 수 없고, 또 안 좋은 상황도 계속 안 좋지는 않을 거라고 믿거든요.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고착되는 일 따위 영원히 없을 것 같은 자다운 대답이다.
바로 옆 탁자 위에 올려둔 모자를 챙겨 들고 산뜻하게 일어나며 그가 말했다. “그런데 앨범에 관한 질문이 생각보다 별로 없네요?” 너무나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하다고, 그리고 완성된 곡들이 정말 좋다더라는 이야기를 슬쩍 들었기에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소문 많이 내주세요. 노래 좋다고.” 그는 기어코 가장 사랑하는 음악으로 다시 우리에게 말을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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