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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에 대한 올바른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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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중정당 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도동서원 중정당 마루에서 바라본 풍경.

집의 미래

박제된 듯한 전통 건축물에도 생생한 목소리와 고유의 미덕이 담겨 있다. 〈건축탐구 집〉을 이끄는 건축가 임형남 · 노은주가 옛집을 대하는 방식.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

내소사 설선당 내부.

내소사 설선당 내부.

도동서원 축대에 조각된 다람쥐와 꽃 장식.

도동서원 축대에 조각된 다람쥐와 꽃 장식.

설선당 입구.

설선당 입구.

자연스러운 멋이 있는 부석사 석축.

자연스러운 멋이 있는 부석사 석축.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의 산천재.

‘산속에 하늘이 담긴 집’이라는 뜻의 산천재.

〈집의 미래〉는 다양한 전통 건축물을 ‘집’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소개한다. 궁궐과 서원, 사찰 등 공공의 공간까지 집이라고 부른 이유는
노은주(이하 노) ‘집’은 인간이 생활하는 모든 공간을 통칭한다. 서원은 교육 시설인 강당과 기숙사가 있어 학생들의 생활공간이나 마찬가지였고, 궁궐 역시 왕과 그 가족이 사는 집이었다. 사찰도 결국 신과 그 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사는 집 아닌가. 우리 전통 건축물은 박물관에 박제된 표본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한때 누군가의 생활 속에 현존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 건축을 좀 더 편하고 친근하게 부르길 바라는 마음에 집이라는 표현을 포괄적으로 사용했다.
책에 소개된 공간은 모두 과거의 집들이다. 그럼에도 〈집의 미래〉라는 제목을 붙인 데는 어떤 의도가 있을까
보통 (건축의) ‘미래’라 하면 AI나 3D 프린트 같은 최첨단 기술을 떠올린다. 하지만 기술만 앞세우다 보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건축의 본질은 결국 사람과 자연이다. 혹독한 날씨와 야생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닌가. 한옥을 지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집의 본질을 되새기자는 의도다. 임형남(이하 임) 오늘날 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현재는 그저 사고파는 것, 재산 증식 수단으로만 여겨지지 않는가. 옛집이 지닌 가치는 미래에 우리가 살 집을 위한 주요 좌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건축가로서 국내외의 많은 집을 보고 지어왔다. 그럼에도 꾸준히 옛집을 찾는 이유가 궁금하다. 어떤 점이 특별하게 다가오나
집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기준은 규모나 값비싼 재료에 있지 않다. 그보다 주인의 성격이나 개성이 얼마큼 잘 드러나는가에 있다. 한국의 옛집 중엔 짓는 사람의 사고와 철학,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례가 많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옛집을 통해 사람을 읽는 방법을 익힌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집에 가면 주인의 성향이 금방 읽히고, 반대로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공간 취향이 쉽게 파악된다. 물론 옛집 특유의 분위기와 미감 덕분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도 한몫한다(웃음).
언뜻 볼 땐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는 게 한국 전통 건축이 어려운 이유가 아닐는지. 옛집을 볼 때 무엇을 중점적으로 살펴야 그 가치를 잘 알 수 있을까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우선 편하게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공간에 머물며 저마다 드는 느낌에 집중하는 것이다. 나 역시 전문가지만 특별한 사전조사나 지식 없이 옛집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한번 쭉 둘러본 다음 마음에 드는 곳에 앉아 잠잠히 있어본다. 마루에 앉아 햇빛과 바람을 느끼고, 오래된 나무와 종이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그 자체로 무척 좋다. 또 그렇게 있다 보면 ‘이런 점이 참 좋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좋은 책은 천천히 읽게 되듯, 음미하다 보면 다가오는 것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공간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도 좋다. 서원을 예로 들면 우선 공부하는 강당(강의실)이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동재와 서재(기숙사)가 있다. 그 뒤로 스승들이 강의하는 입교당, 더 안쪽엔 음식 준비나 책 보관을 위한 서비스 공간이 자리한다. 이 같은 구성 속에서 스승과 학생, 관리자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짐작해 본다면 공간이 한결 입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옛집이라고 해서 모두 남향에 단층 구조인 것도 아니다. 조금씩 다른 향과 배치, 마당 또는 바깥 자연과 어떤 식으로 만나고 있는지 눈여겨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보통 한옥에 가면 정면에서 사진 한번 찍고 가까이 들여다보고 말지 않나. 한발 물러나 좀 더 넓고 다양한 각도에서 공간을 바라보면 마당과 길, 다른 건물과의 관계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공간도 차츰 달리 보인다. 많이 다니면서 비교해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영화 한 편만 보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알 수 없듯, 옛집도 많이 경험할수록 취향과 보는 눈이 생긴다.
경남 산청에 있는 ‘산천재’에 조선시대 최고의 집이라는 찬사를 붙였다. “절묘한 공간 구성도 없고 아름다운 건물의 집합도 없는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산천재는 남명 조식(1501~1572)이 말년에 지은 곳으로 상당히 묘한 구석이 있다. 공간에 들어서면 매화나무 한 그루와 팔작지붕을 얹은 집이 나지막하게 서 있을 뿐인데, 하지만 볼수록 매력적이다. 마치 평양냉면 같달까. 지리산 천왕봉이 잘 보이는 지점에 놓인 것이 포인트다. 보존을 위해 최근 단청을 새로 칠해 본래 멋은 사라졌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자리에 점 찍듯 놓인 집과 마주하면 조식 선생의 엄격하고 강인한 성정이 느껴진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조식과 이황은 1501년생 동갑에 당시 학문으로 쌍벽을 이뤘다. 도산서당 역시 이황이 말년에 지은 집인데,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마루에 앉으면 그대로 한숨 자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다. 이황의 온화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옛집 중엔 생각보다 컨셉트가 확실한 집이 많다. 봉정사의 영산암도 무척 좋다. 최근 〈혼례대첩〉이라는 드라마에도 나왔는데, 공간이 나오는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따로 캡처까지 했다(웃음). 지금이야 산에 집을 지을 때 축대를 쌓아 땅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건물을 올리지만, 영산암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집을 배치했다. 우화루 아래 좁은 문을 통과해 정갈한 돌계단을 오르면 상당히 유기적이고 절묘하게 구성된 공간이 나타난다.
부안에 있는 내소사 설선당 역시 지형에 맞춘 입체적 구성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한옥은 단층이라는 선입견을 깨는 구조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내소사 설선당은 ‘ㅁ’ 자 구조인데, 가만 보면 가운데 집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맞지 않다. 심지어 양옆 건물의 지붕이 앞으로 삐져나와 가운데 건물을 가리기도 한다. 건물 세 채의 높이도 제각각 다르다. 땅을 평평하게 만들면 간단한 것을, 기둥의 사이즈를 달리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모습이 무척 자연스럽다. 우리 선조들은 반듯한 걸 싫어했다. 뭐든 하나를 비틀거나 틀을 깼다. 이런 이유로 한국 전통 건축물은 사진을 찍으면 멋있게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공간을 픽처레스크한 풍경이 아니라 ‘움직임’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기(氣)가 흘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칭이 딱 맞으면 흐름이 막혀 좋지 못하다고 여겼다. 물이 고이면 썩는 것처럼 말이다.
비정형적인 배치 역시 한국 옛집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김명관 고택이나 소수서원을 두고 “윷가락을 던져놓은 것 같다”고 표현한 것처럼 말이다
옛집의 배치는 대체로 질서정연하지 않다. 기준선도 없고, 각도도 잘 안 맞는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성의가 없고, 심지어 측량을 못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사실이 아니다. 자연과의 관계를 우선시해 ‘어떤 산을 볼지’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에서 안산, 주산, 좌청룡, 우백호의 개념처럼 남자, 여자, 아이들이 보는 산이 각기 달랐을뿐더러 방향을 약간 틀어서 특정 공간이 더 넓고 길게 보이도록 유도했다. 무심한 듯 보여도 다 의미가 있다.

봉정사 영산암 내부.

봉정사 영산암 내부.

선교장 열화당 대청에서 바라본 행랑채.

선교장 열화당 대청에서 바라본 행랑채.

대청 아래로 물길이 흐르는 남간정사.

대청 아래로 물길이 흐르는 남간정사.

김명관 고택의 사랑채.

김명관 고택의 사랑채.

도동서원 환주문.

도동서원 환주문.

좀 더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건 어떤가. 옛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디테일은 어떤 게 있을까
난간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 보통 전통 건축의 난간을 생각하면 한옥에서 흔히 보이는 곡선의 계자난간을 떠올리지만, 소수서원의 경우 몬드리안의 그림처럼 모던한 구성이다. 기단 역시 공간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기 때문이다. 궁궐은 반듯하게 가공한 석축으로 높은 기단을 만들었는가 하면, 서민들은 석축을 쓸 수 없었기에 단이 없거나 흙을 낮게 쌓아 아기자기하게 구성했다. 서원이라는 공간에서도 단이 하나인 건물은 후배들의 기숙사, 2개인 건물은 선배들의 기숙사였다. 이렇게 알고 보면 재미있는 포인트가 군데군데 숨어 있다.
결국 어느 하나만 보고 그 진가를 다 알 수 없는 것이 한국 옛집의 특징인 듯하다
건축이든 조경이든, 한국 전통 공간은 드러나지 않게 독특하다. 신경 써서 봐야 그 아름다움이 제대로 읽힌다. 많은 사람이 일본 건축의 정교함을 높이 사곤 하는데, 알고 보면 한국 건축의 정교함도 그에 못지않다. 서까래를 예로 들어볼까. 일본이나 중국은 지붕을 반으로 나눠 서까래를 배치하는데, 한국은 ‘선자연’이라 해서 부챗살처럼 늘어놓는다. 이 경우 목재들의 사이즈가 미묘하게 달라져 시공 난이도가 크게 올라간다. 지나치게 정교하고 딱 맞는 것, 의도가 너무 뻔히 드러나는 건 오히려 경박하고 낮은 수준의 아름다움으로 여겼다. 이런 기개가 우리에겐 있었다. 기둥도 마찬가지다. 전통 건축물의 기둥 아래를 자세히 보면 주춧돌 모양이 제각각 다르다. 처음부터 같은 크기의 돌을 사용하면 편한데, 주변에서 아무 돌이나 갖다 두고 거기에 기둥 크기와 형태를 맞췄기 때문이다. 공간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옛 목수들의 자유로움과 대범함이 마냥 신선하다. 지금은 무엇이든 규격화돼 있지 않나. 보다 보면 그들처럼 자유로운 건축을 하고 싶다는 부러움까지 인다.
결국 한국적 건축이란 이렇다 할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럼에도 몇백 년 전의 옛집과 오늘날 한국 주택 사이에 이어지고 있는 정체성이랄 게 있을까
조선시대 한국 건축의 정체성이 꾸준히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건축가로서 현대건축의 언어로 한국의 아이덴티티를 어떻게 반영할지 꾸준히 탐구하고 있다. 단지 기와나 서까래를 더한다고 해서 한국성을 띠는 건 아니듯 이 땅에 어울리는 건축이 무엇이고, 보이지 않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한다. 일례로 설선당처럼 유기적이고 입체적인 공간 구성을 한국성의 일환으로 보고 설계에 적용해 본 적도 있다. 물론 모든 건물이 한국성을 지녀야 하는 건 아니다.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결국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역사를 기억한다는 건 우리의 근본을 기억한다는 거니까.

엘르
content@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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