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인 연출
OTT를 통해 상업영화 뿐 아니라 독립, 단편작들을 과거보다 수월하게 만날 수 있는 무대가 생겼습니다. 그 중 재기 발랄한 아이디어부터 사회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메시지까지 짧고 굵게 존재감을 발휘하는 50분 이하의 영화들을 찾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다정(정지현 분)은 반의 우등생으로 글솜씨도 뛰어나 백일장에서 종종 상을 받았다. 그런데 자신이 낙선한 백일장에서 서정(김혜윤 분)이 상을 받자, 서정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다정이 관찰한 서정은 늘 혼자다. 이상의 시와 일본 소설을 좋아한다. 하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꼭 자신만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런 서정이 궁금해 다정이 다가간다. 또 서정이 쓰는 시가 궁금하다. 다정은 서정이 상을 받은 시가 궁금해 보여달라고 부탁하지만, 서정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게 쉽지는 않다. 마침, 다정도 일본 소설을 즐겨 읽던 터라, 서정이 읽고 있던 아사카 코타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가간다.
다정은 늘 혼자인 서정을 살뜰히 챙기며 더욱 가까워진다. 여전히 서정은 자신의 시를 다정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서정이 자신이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됐던 시집들을 추천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서정이 쓴 ‘맨얼굴의 여름’이란 글을 발견하고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아마도 자괴감일 것이다. 순간 다정은 서정의 글을 옮겨 적는다.
다음 백일장, 서정은 참여하지 않았다. 다정은 백일장의 주제인 ‘여름, 얼굴’을 본 후, 서정이 썼던 ‘맨얼굴의 여름’을 기억해 내 적기 시작한다. 다정은 서정의 글로 백일장 대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자괴감은 더욱 심해지고 죄책감까지 느껴 서정과 거리를 둔다.
서정이 아버지의 발령으로 전학을 가던 날, 서정은 그동안 고마웠다며 CD를 선물로 다정에게 건넨다. 다정은 다시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다. 서정이 시집 한 편에 써뒀던 ‘맨얼굴의 여름’은 서정의 글이 아닌 무명 가수의 노래 가사였다.
서정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던 다정의 세계는 처음 겪는 강한 질투와 동경으로 흔들리고 있다.
영화는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인상을 준다. 초록의 여름은 현실감을 주고, 환상 같은 몽환적인 장면은 붉은색이 배치됐다. 달뜬 청춘의 질투가 책, 시, 노래들과 함께 꿈결처럼 엮였다. 서정 역을 맡은 김혜윤의 말간 얼굴을 볼 수 있는 단편작이다. 이야기는 다정의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중간마다 삽입된 서정의 내레이션을 통해, 다정만큼 서정도 다정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을까. 러닝타임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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