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뉴스 신선 기자] 요리사이자 CEO로 요식업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백종원. 대한민국 요식업계는 백종원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음식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빚더미에서 탈출한 백종원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백종원의 유년기
1966년 9월 4일 충남 예산군에서 태어난 백종원은 어렸을 때부터 장사꾼 기질이 탁월했다. 9살 때 산에서 놀다가 본 버섯농장의 주인이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버섯농장 주인을 하겠다고 다짐할 만큼, 장사에 유달리 관심이 많았다.
10살이 된 백종원은 어느날 학교에서 소품을 떠났다. 점심 시간에 친구들이 챙겨온 도시락과 음료들을 유심히 관찰하던 그는 음료들이 담긴 빈 유리병을 팔면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해, 리어카를 빌려 공병을 모아서 고물상에 팔아 큰 돈을 벌게 되면서 처음으로 장사의 묘미를 느꼈다고 한다.
장사 대한 철학을 깨닫다
이후 서울로 상경해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한 백종원은 1985년, 19살 되던 해에 친한 형의 소개로 중고차 장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하지만 딜러들의 장사 실력이 부족해 고객들을 놓치자, 백종원은 직접 딜러로 나서 첫 고객에게 차를 판매하는 데 성공하고, 며칠 만에 6대의 차들을 줄줄이 팔았다.
그러나 중고차를 산 고객이 돌아와 미터기 조작과 사고 경력이 있는 차를 팔았다며 백종원의 뺨을 때렸다. 이 사건으로 장사에 대한 철학을 깨달았지만, 다른 구매자들도 따지러 올까 봐 빠르게 손을 뗐다.
장사의 매력에 빠진 백종원
고등학교를 마친 후 연세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백종원은 압구정의 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맥주를 마음껏 마시고 싶어 호프집을 선택한 그는 주변 상권에 치킨 가게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주인 할머니에게 치킨 배달과 포장을 제안했다. 그 결과, 치킨 배달 전화가 쉴새 없이 빗발치며 가게의 매출은 백종원의 안목 덕분에 계속 올르며, 백종원은 나의 전략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장사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주인 할머니는 많은 손님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어 백종원에게 가게를 직접 하라고 제안했다. 백종원은 가게를 살만한 돈이 없었으나, 할머니는 지금 가진 돈만이라도 가져오면 가게를 내주겠다고 하면서 백종원에게 가게를 내놓을테니 인수해서 직접 운영해보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백종원은 가게를 살만한 돈이 없다며 거절하자, 할머니는 지금 가진 돈만이라고 가져오면 가게를 내주겠다고 하면서 백종원에게 가게를 넘긴다.
성공, 그리고 실패
그렇게 백종원은 요식업에 뛰어들어 사업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가게를 3개나 운영하며 15억원대의 자산가가 된다. 사업을 더욱 넓히고 싶었던 백종원은 나이트클럽까지 인수할 계획을 세우다가 보수적인 가족들에게 걸려 인수를 포기하고 주식투자를 한다. 하지만 투자에 실패를 하고 부도가 나버려, 백종원은 쫓기듯이 군입대를 하게 된다.
군대에서도 요리와 함께
입대를 한 백종원은 1989년 학사 장교로 지원을 해, 포병장교로 군복무를 한다. 중위로 진급을 한 백종원은 훈련을 빠질 궁리를 하다 간부 식사를 맡고 있던 부사관과 보직을 바꿔서 근무를 하게 된다. 간부 식당에서 무시를 받는 게 거슬렸던 백종원은 자신의 실력을 인정 받기 위해 무 채를 써는 연습을 해 무생채를 칼로만 0.5cm로 채써는 것에 성공해 취사장교로 인정을 받게 된다.
식재료를 직접 구하러 다니기도 하면서 채소의 가격이 싼 날을 파악해 식재료비를 절감하는 등의 우수한 성과를 보이며 행복하게 군생활을 마무리 했다고 한다.
쌈밥집, 백종원 요식업의 시작
전역을 한 후, 백종원은 부동산 사장과 대화 하던 중, 얼떨결에 싼 가격의 식당 하나를 인수하게 된다. 1993년, 백종원의 첫 정식 식당인 쌈밥집을 개업했다.
하지만 게획 없이 시작한 장사였던 만큼, 쌈밥이라는 메뉴로 이득을 남길 방법을 궁리하던 백종원은 삼겹살을 팔기로 하고, 원가 절감을 위해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와 직접 손질을 하기로 한다. 다른 육절기들보다 훨씬 싼 가격의 육절기를 발견한 백종원은 곧바로 구매를 하고 고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싼 가격에 무턱대고 사왔던 육절기는 알고보니 고기가 아닌 햄을 써는 육절기였다. 하지만 당장 가게를 열어야 했던 백종원은 그대로 얇디 얇게 썰려 말린 고기를 그대로 팔았고, 대패밥 같이 생겼다는 손님의 말에서 영감을 받아, 대패삼겹살의 특허 신청을 해 1996년에 상표출원을 한다.
갑자기 찾아온 불행
그렇게 쌈밥집으로 큰 성공을 거둔 백종원은 쌈밥집의 운영을 지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다른 목표였던 무역으로 고개를 돌린다. 백종원은 쌈밥집으로 번 돈을 모두 목조주택 사업에 투자해 미국의 자재공급업체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무역업을 시작한다. 때마침 건축업계의 트렌드와도 맞아떨어져 백종원의 첫 무역업은 연매출 50억이라는 큰 이득을 보게된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찾아온다. 환율이 폭등을 하며 사업은 적자를 보게 되고, 백종원은 한순간에 빚쟁이가 되어버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백종원을 돕던 지인들은 그의 사업의 하락세를 보고 서서히 백종원의 곁을 떠나갔다.
음식에 대한 열정을 되찾다
사업도, 삶도 모두 순식간에 잃은 백종원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며 “먹고 죽자”는 생각으로 홍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저 음식이 좋아 요식업을 했던 백종원은 초심으로 돌아가 홍콩의 모든 맛집들을 탐방하면서 다시 한 번 음식에 대한 열정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채권자들에게 무릎을 꿇고 식당을 해서 돈을 갚겠다고 약속을 한 백종원은 다시 쌈밥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업 확장을 구상 중이던 백종원은 당시 한국의 포장마차들을 보며 위생적이고 시설이 큰 포장마차를 운영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신포차’를 1998년 논현동에 차리게 된다. 특히 닭발메뉴를 먹기 위해 매일 사람들이 줄을 설만큼 인기가 상당했다.
그렇게 돈을 갚아가며 다시 인생의 낙을 서서히 찾아가던 백종원. 어느날, 한국 사람들이 불고기보다 일본의 야끼니꾸를 선호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불고기 소스로 야끼니꾸를 재현하려 하던 그는 고기에 양념이 잘 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양지를 얇게 썰어 최초의 우삼겹을 개발한다.
요식업을 섭렵하다
이제 빚을 갚는 게 목표가 아닌, 더 큰 성공을 바라보는 백종원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며 본가, 연탄일번지, 홍콩반점, 나아가 빽다방까지 오픈하며 요식업의 전설을 써내려가게 된다.
음식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인생의 나락에서 정점을 찍은 백종원. 백종원의 여정은 실패와 절망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이 빚어낸 성공 이야기다.
어쩌면 그의 일대기는 영화처럼 절대 쓰러지지 않는 영웅 이야기보다는, 아무리 쓰러져도 열정만 있다면 포기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담은 서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당신도 백종원처럼 어떠한 불운이 닥쳐도 자신의 열정을 믿고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
문화뉴스 / 신선 기자 press@mnh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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