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두 페르소나가 한 영화에
로버트 드 니로 VS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 릴리 글래드스톤
시상식에서 상을 받지 않았다고 해서 아니, 후보에 오르지 않았다고 해서 그 배우의 연기가 부족하거나 훌륭하지 못한 건 당연히 아니다. 지난 10일(미국 현지시간)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5명의 후보 명단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었던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도 마찬가지다.
한 해 동안 개봉한 숱한 영화의 남자 주연배우 가운데 고작 5명만이 선정된 것이니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영예인 건 분명하다. 그 5명 외에도 많은 배우가, 주·조·단역 배우가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고 우리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안겼다.
후보 선정 시 논의됐으리라 생각되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호연은 영화 ‘플라워 킬링 문’에서 이뤄졌다.
‘플라워 킬링 문’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두 페르소나가 처음으로 만난 영화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 ‘코미디의 왕’ ‘좋은 친구들’ ‘케이프 피어’ ‘카지노’ ‘아이리쉬 맨’에 이어 10번째 함께한 로버트 드 니로. ‘킹스 오브 뉴욕’ ‘에비에이터’ ‘디파티드’ ‘셔터 오브 아일랜드’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 6번째 함께했으며, 차기작 ‘더 웨이저’까지 함께할 리어나오 디캐프리오.
‘각자’ 스코세이지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어 영화 안으로 들어갔던 두 배우가 ‘함께’ 스코세이지와 만나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기대를 모았다. 1920년대 오클라호마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석유가 터져 부자가 된 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이지족, 그들의 재산을 노리는 백인 커뮤니티가 벌이는 배신과 연쇄살인의 이야기에서 두 배우는 삼촌(윌리엄 킹 해일, 로버트 드 니로 분)과 조카(어니스트 버크하트,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로 등장한다.
31년의 나이 차와 상관없이 데뷔 이후 죽 세계 영화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배우로서의 에너지를 최고치로 채운 두 배우의 만남은, 누가 더 마틴 스코세이지의 페르소나일까를 궁금해하는 호사가들의 관심과 달리, 피 튀기는 카리스마 대결이 아니었다.
성공한 삼촌이 아직 입지를 다지지 못한 조카를 가스라이팅 하다시피 정신적으로 압도하고 지배한다. 로버트 드 니로 앞에서 마치 기가 죽은 고양이나 충직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충성과 존경을 보이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모습은 새로운 만큼 짜릿하다. 신사의 가면을 쓴 악마 삼촌, 이름(어니스트)처럼 정직함을 완전히 버릴 수 없었던 조카, 영화 말미 전복의 반전이 있기는 하나 심리적 서열은 유지된다.
새롭다 못해 낯선 디캐프리오의 표정은 드 니로가 아니라 오세이지족 인디언 몰리 카일리 역의 릴리 글래드스톤과의 장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택시(자가용으로 영업하는 ‘우버’ 느낌)를 모는 어니스트는 몰리를 손님으로 태운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우아함과 차분함이 풍기는 숙녀 몰리에게 반한 것인지, 순혈 인디언과 결혼해 유산으로 땅을 받는 게 ‘빠르게’ ‘크게’ 부자가 되는 법이라는 삼촌의 조언을 따르는 것인지, 영화 끝까지 봐도 헷갈릴 만큼 디캐프리오의 연기는 다층적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아내가 된 몰리가, 죽다 살아난 아내가 남편 어니스트에게 내게 무엇을 주사 놓았는지 묻는 장면에서 나온다. 거짓말을 하면 무엇을 얻을지 소중한 ‘누구들’과 함께할 수 있을지 뻔히 알면서도, 주저하고 갈등하던 어니스트는 “으읍…인슐린이지”라고 말한다.
아! 이 말을 하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얼굴 근육 움직임, 눈빛, 시선의 방향, 손짓, 굽은 등에는 천사와 악마가 양쪽 귀에서 소근 대는 ‘정반대’의 소리가 ‘동시’ 노출된다. 향후 인생 행로가 걸린 한마디의 답변, 그 불안과 기절할 것 같은 어지러움의 복잡다단한 심경 속에 결국은 ‘절망을 부르는 정직’을 말하는 모습이라니!
인간이 인생 전체에서 지을 수많은 표정과 감정을 단 몇 초 사이에 얼굴에 쏟아내는 단지 연기력에 감탄이 인 건 아니다. 남자든 여자든 보자마자 반할 ‘신화 속 미소년’ 같은 외모로 등장했을 때부터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중년 사내의 고독과 격렬한 인생의 맛을 연기하고 있는 요즘까지…이토록 현실적 표현을 디캐프리오에서 본 적이 있던가! 싶은 발견에 탄성이 나왔다.
배우가 잘생기면 인기를 얻기는 상대적으로 쉬우나 연기를 호평받기는 꽤 어렵다. 잘생긴 외모가 걸림돌이 된다, 연기의 리얼함을 떨어뜨리고 ‘가짜’임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때로는 외모를 넘어서는 뜨거운 감성으로, 때로는 외모를 가리는 극적 표현으로. 때로는 미모를 장점으로 살리는 정밀히 계산된 연기로 외모와 연기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왔다.
얼굴 천재, 연기 천재인 그도 못 하는 게 있으니 ‘날 것 같은’ 표현이었다. 그런데 ‘플라워 킬링 문’에서 배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것 같지 않게 낯선, 극이 아니라 현실인 것처럼 날 것의 연기를 만난 것이다.
디캐프리오 자신이 잘한 건 두말하면 입 아프고, 두 명에게도 공을 나누고 싶다.
먼저, 표정과 몸짓으로 인상적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작품의 공기를 만들어 영화에 기여한 릴리 글래드스톤이라는 걸출한 배우다. 오랜 세월 대중에게 받은 사랑이라는 든든한 ‘백’(back, 배경)을 지닌 로버트 드 니로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에너지에 전혀 밀리지 않았을 뿐더러 보듬고 품었다. 디캐프리오는 글래드스톤이라는 ‘비빌 언덕’ 앞에서, 모든 걸 다 받아 흡수하는 상대역 앞에서 명장면을 훔쳤다.
다음은 예상하듯,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다. 배우 하정우가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 공개 후 언론 인터뷰에서 “윤종빈 감독에게는 ‘가짜’가 통하지 않는다. 대학교 시절부터 나를 봐왔기에, ‘형, 진짜 빡 칠 때 이 표정 아니잖아요’ 말하면 꼼짝없이 다시 해야 한다. 저는 제 일상 표정을 본 적이 없기에 감독이 원하는 딱 그 표정이 뭔지 알 수 없고, 단지 진짜 감정을 저 심연에서 끄집어내야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맥락으로, 이미 다섯 개 작품을 함께하고 여섯 번째로 만난 스코세이지 감독이기에 디캐프리오의 현실 표정을 아는 그이기에 ‘진짜’를 끄집어낸 건 아닐까.
새로이 이목을 집중시키는 배우의 등장도 매우 즐겁지만, 익숙한 배우에게서 발견하는 낯섦은 ‘아니, 아직도 또 보여줄 새 얼굴이 있다고?’라는 놀라움을 일으키며 제법 큰 기쁨을 안긴다. 웃을 일 만들기도 쉽지 않은 세상, 투자하기에 아깝지 않은 206분이다.
게다가 헐리우드 자본의 힘 속에서도 자신의 영화적 개성을 흔들림 없이 지키며, 세상의 속성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해온 마틴 스코세이지의 작품 아닌가. 이제 한두 작품만 더하면 더는 신작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데, 늦어서 후회할 일 없게 챙겨봄 직한 명화다. Apple TV+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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