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신작…성역할 벗어나려는 여성의 오디세이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에마 스톤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변신의 귀재다.
‘좀비랜드’, ‘이지A’, ‘헬프’,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크루엘라’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통해 탈바꿈을 거듭했다.
그래도 우리 관객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은 데이먼 셔젤 감독의 ‘라라랜드'(2016) 속 얼굴이다. 스톤은 이 작품에서 꿈을 좇아 로스앤젤레스(LA)에 갔다가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진 배우 지망생을 연기해 첫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영화 팬들은 이때를 스톤의 최전성기로 여긴다. 하지만 개봉을 앞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가여운 것들’을 본다면 곧 생각이 바뀔 것 같다.
‘라라랜드’에서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청춘을 선보인 스톤은 이 작품에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나이도, 성격도, 목표도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를 경이롭게 표현했다.
이번이 란티모스 감독과 네 번째 협업인 스톤은 그의 뮤즈 구실을 톡톡히 하며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등 각종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싹쓸이했다. 미국 아카데미에서도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꼽힌다.
그가 소화한 역할은 쉽게 말해 ‘여자 프랑켄슈타인’이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런던 브릿지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귀족 여성 벨라(에마 스톤 분)는 무슨 사연인지 만삭인 몸으로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이를 본 천재 외과 의사 갓윈(윌럼 더포)이 그를 살려내는데, 방법이 기괴하다. 벨라가 품은 태아의 뇌를 꺼내 그에게 이식하는 것이다.
갓 태어난 것과 다름없는 벨라는 인간처럼 보이는 어떤 생물에 불과하다. 육체는 성인이지만 정신은 한두살배기인 그는 갓윈으로부터 말과 글을 익히고 세상의 이치도 조금씩 깨친다.
그러나 갓윈은 실험의 성공에 고무될 새도 없이 벨라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게 된다. 벨라의 미모에 반한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이 그를 유혹하면서다. 벨라 역시 성적 쾌락에 눈을 뜨면서 던컨에게 관심이 생긴다.
벨라는 던컨을 따라 리스본으로 향한다. 이때부터 벨라는 잠자리가 주는 열락을 끊임없이 탐닉한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파리 등 유럽 곳곳을 도는 동안 초고속 사회화를 거친다. 부의 불평등을 마주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털어주기도 한다.
던컨은 벨라가 너무 똑똑해지는 게 못마땅하다. 벨라 역시 던컨이 시시해지자 스스로 매춘부가 된다. 런던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는 건 두 번째 목적이다. 던컨이 아닌 다양한 남자를 경험하는 게 우선이다.
스토리가 이렇다 보니 영화의 상당 부분이 정사 장면으로 구성됐다. 스톤은 옷을 입은 것보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나 반라인 채 등장하는 신이 더 많다고 생각될 정도로 파격 노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단순히 ‘벗었다’고 해서 그의 연기에 대한 찬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가 속살을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듯, 스톤은 자기 몸을 드러내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람처럼 연기한다.
수위 높은 베드신 역시 마찬가지다. 벨라는 수치심을 모르고 욕망과 호기심을 충족하는 게 먼저인 인물이다. 스톤은 성인 여자로서의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백지가 돼 그 안에 벨라를 채워 넣는다. 어떤 톱스타가 이런 용기 있는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스톤은 걸음마를 막 뗀 영아부터 의사를 꿈꾸는 지적인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몸소 보여준다. 간단한 단어조차 말하지 못하던 벨라가 대학교 서적에서나 볼 법한 고급 어휘를 사용하며 던컨과 전남편 입을 꾹 다물게 하는 장면을 보면 그가 대견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는 한 여성이 남성 권력 사회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 중 남자들은 벨라를 끊임없이 속박한다. 아버지 격인 갓윈은 바깥이 너무 위험하다며 벨라를 집에 가두다시피 하고, 던컨은 그를 독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벨라는 남자들의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힘으로 삶을 개척한다.
일각에선 이 작품이 페미니즘 영화인지를 두고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여성의 성적 자유를 주로 이야기해 자칫 성(관계)의 해방이 여성 해방의 전부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란티모스 감독은 적어도 영화에 페미니즘 메시지를 담아내려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극 중 남성 캐릭터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풍자적이고 지질하게 그려진 반면, 벨라를 비롯한 여성 캐릭터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난다.
란티모스 감독 작품 특유의 괴이한 분위기와 판타지 같은 영상미는 이 영화를 한 편의 오디세이로 보이게 한다.
흑백으로 시작한 화면은 벨라가 세상에 눈을 뜰수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화려한 색감으로 변모한다. 초광각 렌즈를 활용한 일부 장면 덕에 그의 성장기를 훔쳐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 등 전작보다 스토리와 메시지 면에서 비교적 대중적이어서 란티모스 감독의 팬이 아닌 사람들이 입문하기 좋은 작품이 될 듯하다.
다수의 주요 영화 매체에서 ‘올해의 영화’로 꼽은 이 작품은 조만간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13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3월 6일 개봉. 141분. 청소년 관람 불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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