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ㅇ난감’ 각본가 김다민 감독 데뷔작…사교육 열풍 풍자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대머리가 영어로 뭐야?”
밥을 먹는 아빠의 정수리를 유심히 바라보던 동춘(박나은 분)이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혜진(박효주)은 숟가락을 탁 내려놓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우리 동춘이가 영어유치원에 갈 때가 됐구나.”
김다민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주인공 동춘의 삶은 이때부터 고달파진다. 부모는 초등학교 입학도 안 한 딸을 살벌한 사교육 현장으로 밀어 넣는다. 동춘은 국·영·수는 물론 미술, 태권도, 논술, 코딩, 한국사 학원을 뺑뺑이 돌고 늦은 밤 집에 오면 숙제하기 바쁘다.
자야 할 시간에 잠을 못 자 키가 자라지 않자 엄마는 ‘키 크는 병원’에 아이를 데려간다. 동춘에겐 성장마저도 이뤄내야만 하는 과업이다.
그를 줄곧 따라다니는 질문 하나.
‘대체 이걸 왜 해야 하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하지만 시원스레 답해주는 어른은 없다. 실은 엄마 아빠도 선생님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자기들 역시 누군가가 살라는 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동춘이 정답을 알 기회는 뜻밖에 찾아온다. 수학여행에 갔다가 발견한 막걸리 한 병을 집으로 챙겨오면서다.
조용히 발효 중이던 막걸리는 어느 날부터인가 기포를 톡톡 터뜨린다. 평범한 아이라면 무심히 지나칠 법하지만, 사교육으로 단련된 동춘은 이 소리가 페르시아어를 모스 부호로 변환한 신호라는 걸 알아챈다.
영화는 동춘이 신비한 막걸리를 만나 삶의 이유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로드 무비 형식으로 보여준다.
막걸리와 의사소통을 하고, 인형인 털북·숭이가 비밀 친구로 나오는 등 비현실적 설정이 많아 언뜻 판타지물이나 동춘의 상상 속 이야기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웃픈’ 현실을 반영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극 중 아이들이 살아내는 일상은 판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제삼자의 시각에선 막걸리와 인형이 말을 하는 것보다, 열한살짜리 아이가 미적분을 배우는 게 더 비현실적인 일일지 모른다.
영화는 사나운 질책 대신 유머와 풍자를 통해 어른들의 양심을 쿡쿡 찌르는 방법을 사용한다. 군데군데 코믹 요소를 배치하고 이른바 ‘B급 감성’을 활용하지만, 그 안에는 어른들에게 건네는 단단한 당부가 있다.
재기발랄함으로 무장한 감독의 회초리질은 결말에 이르면 더 아프게 느껴진다. 동춘의 대사처럼 “말이 안 되는” 일을 어린이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면서다.
김 감독은 막걸리, 페르시아어, 모스 부호, 학원, 우주 등 도저히 한 데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소재를 솜씨 좋게 엮어 독특하면서도 묵직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오로라미디어상을 받고 4회차 상영회가 매진되는 등 평단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최근 세계적으로 흥행 중인 넷플릭스 시리즈 ‘살인자ㅇ난감’의 각본가이기도 하다.
28일 개봉. 91분. 전체관람가.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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