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상] 새 역사 쓴 ‘성난 사람들’ 각본‧연출 이성진, 누구?
앞으로 ‘이성진’이라는 이름을 더욱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이성진 감독이 극본을 쓰고 연출한 10부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성난 사람들(BEEF)’이 예상대로 에미상을 휩쓸었다. 16일(한국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피콕 시어터에서 열린 제75회 에미상에서 ‘성난 사람들(BEEF)’은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주요 부문 8관왕을 차지했다. 지난 8일 열린 제81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3관왕, 15일 열린 제29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 4관왕을 잇는 눈부신 쾌거다.
‘성난 사람들(BEEF)’이 에미상과 골든 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즈를 석권하면서 작품을 기획하고 각본과 연출까지 맡은 이성진 감독을 향해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인 감독은 영어 이름 대신 ‘이성진'(LEE SUNG JIN)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전 세계 190여개국에 공개된 ‘성난 사람들(BEEF)’의 크래디트에도 이성진이라는 한국 이름을 올렸다.
● 미국 이민 가정에서 성장, 대학 졸업 뒤 작가로
이성진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9개월 때 가족과 미국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초등학교 기간 3년은 한국에서 보냈지만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네가 성장했다. ‘성난 사람들(BEEF)’의 주인공 스티븐 연처럼 이민자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쌓은 정체성과 감수성은 그의 창작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작가로 일을 시작한 건 대학(펜실베니아대 경제학과)을 졸업한 이후다. 4~5년간의 습작 기간을 거친 끝에 2008년 케이블채널 FXX의 드라마 ‘필라델피아는 언제나 맑음’의 각본가로 참여하는 기회를 얻어 작가로 데뷔했다.
이성진 감독을 전 세계에 알린 ‘성난 사람들(BEEF)’은 감독이 운전하다 겪은 실제 경험에서 출발했다. 운전 도중 신호가 바뀐 걸 모르고 있던 감독을 향해 뒤에 있던 BMW 차량의 백인 운전자가 사정없이 경적을 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난폭 운전을 한 게 시작이다. 이에 감독은 그 차량을 따라잡으려 했고, 그 집요한 추격전의 경험이 ‘성난 사람들(BEEF)’의 토대가 됐다.
지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이성진 감독은 감독상 트로피를 손에 쥐고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임을 밝히면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당시 BMW 운전자에게 특별히 감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 운전자가 다른 창작자들에게도 계속 영감을 주길 부탁한다”고 말해 웃음을 안겼다.
● ‘이성진’ 한국 이름 쓰는 이유, 봉준호 감독 영향
이성진 감독은 지난해 8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관해 서울에서 열린 국제방송영상마켓 특별 세션에 참석해 ‘성난 사람들(BEEF)’ 제작 과정은 물론 미국에서 한국계 작가이자 감독으로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했다.
당시 이성진 감독은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초반까지만 해도 ‘소니'(Sonny)라는 영어 이름을 썼다고 밝혔다. 그러다 이성진이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기로 결심한 데는 영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의 존재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감독은 “‘기생충’ 이후 미국인들이 봉준호 감독의 이름을 발음할 때 실수하지 않았다”며 “좋은 작품을 만들면 미국인들도 더는 한국 이름을 듣고 웃지 않고 그 이름을 기억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부르기 편한 영어 이름 ‘소니’ 대신 이성진이라는 이름을 내세웠다.
‘기생충’은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국제 장편영화상 등 주요 부문 4관왕을 휩쓴 걸작이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창작자는 물론 아시안 작가와 감독, 배우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고 이성진 감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성난 사람들(BEEF)’은 난폭 운전으로 엮인 두 주인공이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휘말리면서 서로를 향해 복수와 반격을 쏟아내는 이야기다. 현대인의 내면에 자리잡은 깊은 우울과 분노를 다룬 주제로도 주목받았다. 지난해 4월 공개 이후 뜨거운 호평을 받았고, 주인공 스티븐 연과 앨리 웡의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연기 대결로도 숱한 화제를 뿌렸다.
이를 완성한 이성진 감독은 영화 ‘미나리’의 정이삭 감독, 오스카를 노리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린 송 감독과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맹활약하는 한국계 연출자로 확고히 자리잡아 가고 있다. 작가이자 감독인 이들은 미국과 캐나다 등 이민자 가정에서 자라면서 쌓은 정체성을 바탕으로 누구도 풀어낼 수 없는 감각적인 이야기로 전 세계 대중을 사로잡고 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