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은 내가 한 모든 것 중 제일 잘 해낸 일”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성공한 여성 사업가 에이미.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그의 삶은 남 부러운 것 없어 보이지만, 정작 에이미는 불행해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이상주의적인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장으로서 고단함, 딸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엄마로서의 부채감, 아시아 여성으로서 편견에 은근한 차별에 맞서 사업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 등이 에이미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렇게 축적된 분노가 우연한 기회에 폭발하자 에이미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억누르고 살던 어두운 내면을 표출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원제 BEEF)에서 에이미 역을 맡은 앨리 웡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녹여낸 연기로 15일(현지시간) 제75회 에미상 시상식에서 미니시리즈·TV영화(Limited Or Anthology Series Or Movie)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 은근하지만 만연한 차별에 맞서 성공 쟁취
할리우드의 아시아계 작가, 배우 겸 코미디언 앨리 웡과 드라마 속 ‘고요하우스’라는 플랜테리어(식물+인테리어) 매장을 운영하는 여성 사업가 에이미는 많은 부분에서 맞닿아있다.
우선 둘 다 아시아 여성으로서 자신을 향한 은근한 경멸과 차별 등을 딛고 커리어 성공을 이뤘다는 공통점이 눈길을 끈다.
베트남인 어머니와 중국계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앨리 웡은 2016년 넷플릭스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건 스탠드업 쇼 ‘베이비 코브라’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입고 임신 7개월 차 만삭의 배를 뽐내며 무대에 오른 앨리 웡은 “임신한 몸으로 코미디를 하는 여성 코미디언을 본 적 있다면 한 명이라도 대보라. 임신하면 사라지는 게 이 바닥의 현실”이라며 현실 속 차별에 당당하게 맞섰다.
2018년 둘째를 임신한 채 출연한 채 출연한 ‘앨리 웡: 성역은 없다’, 2022년 ‘앨리 웡: 돈 웡’ 등에서는 결혼 제도의 부조리, 육아의 현실, 결혼한 여성의 욕망 등 더욱 폭넓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수위 높으면서 직설적이고 시원시원한 화법으로 스탠드업 코미디계 스타로 떠올랐다.
◇ 가정사마저 캐릭터와 비슷…가장 역 해내는 워킹맘의 고충
앨리 웡과 에이미는 가정사에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에이미의 예술가 남편 조지(조지프 리)는 앨리 웡의 이혼한 전 남편 저스틴 하쿠타를 연상한다.
하쿠타는 고(故) 백남준 작가의 조카로 알려진 한국계 일본 사업가 하쿠타 켄의 아들로, 2014년 앨리 웡과 결혼해 슬하에 두 아이를 뒀다. 조지와 마찬가지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는 성공한 아내 덕을 봤다.
극 중 에이미는 금수저로 자라 세상 물정 모르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유지하는 일상에 지쳐있다. 남편의 대책 없는 낙천주의는 지친 에이미에게 위로가 되지 못하고, 딸에게도 늘 부족한 엄마인 것 같다는 죄책감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한다.
에이미와 비슷한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을 느꼈다는 앨리 웡은 이를 코미디로 승화했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던 시절 앨리 웡은 남편을 자주 개그 소재로 삼았는데, ‘당신이 무대에서 하는 말에 대해 남편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고는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제 남편은 집에 있어요. 제가 산 집에서, 제가 ‘아버지의 날’ 선물로 사준 롤렉스 시계를 차고, 제가 매달 요금을 내는 초고속 인터넷으로 야동이나 보고 있겠죠. (……) 제가 무대에서 무슨 말을 하든 남편은 신경도 안 써요. 제가 살고 싶어 하던 삶을 사느라 바쁘시거든요.”(앨리 웡: 돈 웡)
◇ 코미디언에서 배우로…아시아계 최초의 역사 쓰다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앨리 웡은 새로운 도전을 거듭하며 활동 영역을 넓혀 왔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윌튼 극장에서 13개의 공연을 매진시킨 성공한 코미디언이 됐고, 직접 극본을 쓰고 출연한 넷플릭스 영화 ‘우리 사이 어쩌면'(2022)을 흥행시키기도 했다.
웃음기를 덜어내고 도전한 드라마 ‘성난 사람들’ 역시 큰 성공이었다. 10부작인 이 드라마는 지난해 4월 공개된 직후 넷플릭스 시청 시간 10위 안에 5주 연속 이름을 올리는 등 세계적으로 흥행했다.
지난 7일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첫 아시아계 주연상을 받았고, 이어 미국 방송계 최고 권위의 상 에미상에서도 아시아계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앨리 웡은 넷플릭스 공식 유튜브 계정을 통해 공개된 비하인드 코멘터리 영상을 통해 “작업 초기 과정에서부터 소니(이성진 감독)에게 여러 번 말했는데, 이 작품은 내가 그동안 무대 위에서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힘들었던 시기에 함께해낸 정말 아름다운 여정이었어요. 내가 한 모든 것 중 제일 잘 해낸 일인 것 같습니다.”
co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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