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 ‘다양성 추구’와 맞아떨어져
“K-콘텐츠로 한국 문화 친숙…누구나 공감할 주제 다뤄”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한국계 배우·감독이 주축이 된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원제 BEEF)이 골든글로브 3관왕, 크리틱스초이스 어워즈 4관왕에 이어 15일(현지시간) 열리는 제75회 에미상 시상식에서도 11개 부문 후보에 들어 다관왕 가능성이 점쳐진다.
‘성난 사람들’이 미국 주요 시상식을 휩쓰는 것은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한국인 이민자) 콘텐츠가 미국 주류 문화계에서도 주목받고 있다는 방증으로 풀이된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다양성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강해진 데다 한국 콘텐츠가 세계적으로 흥행한 데 힘입은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 ‘미나리’부터 ‘패스트 라이브즈’까지…이민자·소수자 포용 강해져
한국계 이민자 콘텐츠가 미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조명된 첫 사례로는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의 영화 ‘미나리'(2021)가 꼽힌다.
정 감독이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1980년 미국 아칸소로 이주한 한인 가정이 겪는 일을 그렸다.
윤여정에게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겼고,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미국배우조합상 등 굵직한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그러나 당시 골든글로브는 미국 영화인 ‘미나리’를 한국어로 극이 전개된다는 이유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부문 후보에 올려 아시아계 작품 홀대 논란이 일었다.
골든글로브는 올해 심사위원 규모를 기존의 3배로 늘리고 이들의 출신 국가와 성별, 인종을 다양화하며 쇄신에 들어갔다.
그 결과 ‘성난 사람들’은 TV 미니시리즈 부문 작품상, 남우주연상(스티븐 연), 여우주연상(앨리 웡)을 가져갔다.
비록 수상에는 실패했으나, 한국계 캐나다인 신인 감독 셀린 송의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도 골든글로브 5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도 ‘성난 사람들’처럼 한국계 배우인 그레타 리와 한국 배우 유태오가 주연했으며, 이미경 CJ ENM 부회장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남녀가 20년 만에 미국 뉴욕에서 재회하는 이야기가 큰 줄기로, 한국적인 정서가 강하게 녹아있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한국어로 대화한다.
앞서 2022년에는 애플+tv 드라마 ‘파친코’가 포브스 선정 올해의 한국 드라마에 선정되는 등 호평받았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인 이민 가족 4대의 삶을 그린 드라마다.
한국계 작품은 아니지만, 양쯔충(양자경) 등 동양계 배우가 총출동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오스카 7관왕에 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도 미국으로 이민 온 가정의 이야기를 다뤘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비주류로 분류되던 이런 작품들이 평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최근 미국 콘텐츠 업계의 화두로 떠오른 ‘다양성’에 알맞은 콘텐츠여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한 콘텐츠 업계 관계자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 갈수록 문화적 다양성을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며 “가장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던 골든글로브까지도 ‘성난 사람들’에 상을 준 건 변화의 정점”이라고 평가했다.
‘미나리’의 국내 배급사인 판씨네마 관계자도 “미국과 유럽이 추구하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한국계 콘텐츠의 특징과 맞아떨어진다”고 짚었다.
그는 “아카데미는 윤여정 배우에게 여우조연상을 수여한 이듬해에는 ‘코다’에 출연한 청각장애인 배우에게 남우조연상을 줬다”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이민자, 장애인, 소수 인종 등으로 다양성을 넓히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 ‘오징어 게임’·K팝으로 한국 친숙해져…보편적인 이야기도 강점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과 문화권이 섞여 있는 미국이 특히 한국계 콘텐츠에 주목하는 이유로는 세계적으로 흥행한 K-콘텐츠 덕분에 한국에 대한 인지도와 친밀도가 높아졌다는 점이 거론된다. 한국이 더는 낯선 나라로 인식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신드롬급 인기를 누렸다. 그 이전부터는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K팝 그룹이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싱글 차트를 휩쓸며 ‘한국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한국 콘텐츠가 많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면서 한국 음식, 문화, 말, 가치관까지도 친밀하게 다가가는 상황”이라면서 “한국 사람이 나오는 콘텐츠를 낯설지 않게 느낄 만큼 한국은 미국에서 친숙한 문화권이 됐다”고 말했다.
미국 NBC도 “‘성난 사람들’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문화와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면서 “대신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자기들의 공간을 만들면서 주류 문화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인물과 배경 등은 한국적 색채가 강하긴 하지만, 주제는 보편적이어서 공감을 끌어내는 콘텐츠 자체의 강점도 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미나리’는 이민자가 많은 미국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이주 가정 이야기고, ‘패스트 라이브즈’는 사랑하지만 계속해서 엇갈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서 “인종, 언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소구점이 있는 스토리”라고 평했다.
윤 평론가는 “‘성난 사람들’은 경계인의 삶이 나오긴 하지만,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분노, 빈부 격차 같은 보편적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서 “콘텐츠 자체가 재밌고 웰메이드라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파친코’를 공동 연출한 저스틴 전 감독 또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자리에서 자신이 이민자에 관한 영화를 만들지만, 이야기에는 보편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런 작품이 미국 내 다른 소수자나 이민자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를 준다”며 “내 이야기를 하지만 공감대가 형성되고 (다른 이들과) 연결된다”고 설명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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