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단 두편의 영화로 명장이 된 테렌스 멜릭
20년만의 복귀작 씬 레드 라인에 갈린 배우들의 희비
1970년대 ‘황무지’와 ‘천국의 나날들’ 단 두 편의 영화로 영상미를 강조하는 연출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명 감독의 반열에 오른 테렌스 멜릭. 하지만 20년의 세월동안 칩거하던 멜릭은 90년대 말 갑자기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씬 레드 라인’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하는데요.
그저 두 편의 영화를 찍었을 뿐인 멜릭 감독의 복귀 소식에 정말 엄청난 배우들이 지원합니다. 출연을 원했지만 성사되지 못한 배우만 해도 브래드 피트, 디카프리오, 니콜라스 케이지, 케빈 코스트너, 에단 호크, 매튜 매커너히, 조니뎁 등 그야말로 영화제 급 라인업인데요.
조니 뎁은 감독과의 미팅에서 냅킨에 계약서를 쓰자며 언제부터 촬영하면 되는지 알려달라고 할 정도 였고, 디카프리오는 로미오+줄리엣을 촬영하다 감독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미팅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타 캐스팅으로 캐릭터가 흐려질까 걱정한 감독은 이들 모두를 거절했는데요.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조시 하트넷, 닐 패트릭 해리스 등도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캐스팅이 되었다고 해서 출연이 확정된 건 아니었는데요(???). 미키 루크는 상당히 많은 분량을 촬영했지만 단 한장면에도 나오지 않아 감독을 비난했고, 빌 풀먼 등의 배우도 같은 처지였습니다.
심지어 게리 올드만은 캐스팅이 확정되고 대본도 받았는데, 촬영 직전에 감독의 변덕으로 역할이 사라져서 출연이 불발되었는데요. ‘러브 액츄얼리’에서 미국 대통령 역으로 출연했던 빌리 밥 손튼은 이 때 나레이션을 담당, 영화 전체 분량의 나레이션을 녹음했지만 단 한마디도 영화에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영화에서 살아남은 배우들도 있는데요. 우디 해럴슨, 존 트라볼타, 조지 클루니, 자레드 레토 등은 단역에 가까운 카메오 수준으로 그쳤습니다. 특히 존C.라일리는 꽤 많은 분량의 촬영을 했는데 거의 다 잘려나가 매우 비중이 적은 역할이 되었는데, “나만 그랬던 것도 아니다”라며 “좋은 경험이었다”며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였는데요.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피아니스트’ 등으로 친숙한 애드리언 브로디였습니다. 그는 원작 소설의 주연인 ‘파이프’ 역을 맡았는데요. 시나리오에서도 당연히 ‘파이프’가 주인공이었고, 그는 주연으로 영화 찰영을 마쳤습니다.
겁이 많은 병사가 전쟁을 겪으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의 중심이었던 애드리언 브로디. 하지만 시사회에서 영화를 확인한 그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대부분 분량이 편집되어 대사도 거의 없는 엑스트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사(?)가 벌어진 이유는 일단 마음가는대로 잔뜩 찍어놓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살려서 즉흥적으로 편집을 해나가는 테렌스 멜릭 감독의 스타일 때문이었는데요.
영화를 찍다보니 ‘위트’라는 캐릭터에 매료되어 더 많은 분량을 주기로 결정한 멜릭 감독은 영화의 방향을 크게 틀어서 ‘파이프’의 분량을 대폭 덜어내버린 것이죠.
원래 ‘위트’ 역으로 감독이 염두에 둔 배우는 비고 모텐슨이었는데, 결국은 스케줄 문제가 정리되지 않았고, 감독은 그럼에도 크레딧에 그의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감독이 캐스팅하려 했던 배우는 에드워드 노튼이었는데요 하필 합류 직전 모친상을 당하며 장기간 해외 촬영이 불가능하게 되어 불발되었는데요.
결국 위트 역은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배우 짐 카비젤에게 돌아갔고,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연기력을 인정받아 훗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예수 역에 캐스팅 되기도 합니다.
일부 배우들은 다시는 그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황당한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지만 그 예술성은 훗날 크리스토퍼 놀란, 데이비드 핀처, 클로이 자오 등의 감독이 직접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할 만큼 영화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 감독이기도 한데요.
자연을 아름답게 담아내는 영상미도 일품이지만, 300km에 달하는 분량의 필름을 촬영하고, 그걸 이리저리 이어 붙여서 편집해내는 방식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이어붙이는 연출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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