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주연에게 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작품의 만족도, 인지도, 흥행성에 관해 주연 배우가 지니는 영향력은 명확하다. 주인공 캐스팅이 잘못됐거나 주연 배우의 힘이 부족한데 대중의 사랑을 받기란 어렵다.
필자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말을 조연에게 더욱 쓰고 싶다. 주연만 잘하는 경우, 짓다가 만 집처럼 기둥과 서까래만 있고 인테리어는커녕 벽도 지붕도 없이 바람구멍 숭숭 뚫린 경우를 흔히 본다. 또, ‘괜찮네’를 넘어 흡족한 미소를 짓게 했던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어김없이 작품의 구멍을 메우는 건 기본에 보는 맛, 듣는 맛을 주는 차진 연기의 조연 배우들이 반드시 있다. 심지어 몇몇 TV 주말드라마나 일일극의 경우, 기본기 탄탄한 조연 배우들이 깔아놓은 바닥 위에서 신인 배우들이 주연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장기자랑을 펼치기도 한다.
누구라고 이름을 이루 적을 수도 없이 수많은 배우들이 스포트라이트 받지 못하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고 작품을 빚고 버티고 가꾼다. 볼 때마다 고마운 마음이 절로 인다.
그 가운데는 고마움을 넘어 미안함이 이는 배우들이 있다. 조연을 하다 주연으로 발돋움하거나 늘 그렇진 않더라도 종종 주연으로 주목받고 사랑받으면 미안함이 덜할 텐데, 지닌 연기 내공은 말할 것도 없이 오랜 세월 대한민국 콘텐츠의 수준을 높여 왔음에도 제대로 발견되고 충분히 박수받지 못했을 때 품게 되는 미안함이다.
배우 최덕문도 마음 한구석 미안한 연기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드라마 ‘법쩐’에서 서울중앙지검 베테랑 수사계장 남상일로 나왔을 때를 떠올려 보면. 혈기 왕성한 청춘인 동시에 지방대 출신이라는 수식어를 떨치고 싶은 마음에 불철주야 수사에 매진하면서도 해답을 몰라 좌충우돌 갈등하고 실수하는 장태춘 검사(강유석 분) 곁에 늘 남상일 수사계장(최덕문 분)이 있었다.
남 계장은 나이는 자신이 많아 어른이되 수사 체계상 윗선인 장 검사를 깍듯이 모시면서도 때로는 아버지처럼 끼니를 챙기고 때로는 법조계 선배로서 혜안을 빌려줬다. 생색내는 법 없이 묵묵히, 목소리 높이는 법 없이 조용히, 진정 사회적 ‘어른’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
다른 이가 아니고 최덕문 배우가 연기해서 남상일 계장의 말과 행동에 힘이 실렸고, 천방지축 장태춘 검사 쪽에 안정감을 더했다. 출연 분량이 많지 않아도 그 캐릭터의 특성을 우리에게 빠르게 인식시키고, 설득하고, 믿음을 줬다. 이런 훌륭한 연기가 과연 연기력만으로, 연기 기술만으로 가능할까. 필자가 늘 주장하듯, 캐릭터는 배우의 인성에 빚진다. 사람 최덕문의 인성에 빚져 우리는 남 계장을 믿고, 좋은 어른 남 계장 덕에 왠지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처럼 뿌듯하고 훈훈해진다.
이렇게 큰 감명을 받을 때 불현듯, 고마움을 넘어서는 미안함이 엄습한다. 아, 어서 더 큰 배역이 맡겨져야 할 텐데. 큰 배역이란, 배우 최덕문이 인기 스타가 돼야 훌륭하다는 것도 아니고 비중 작은 배역이 하찮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자가 발전하기 어렵다. 대중이 발견해 주고 사랑해 줄 때 덩실덩실 어깨춤이 나고 더욱 정진할 수 있다. 그동안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의 양에 비례하지 않고 스스로 갈고닦아 훌륭한 배우로 성숙해온 것에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것과 별도로, 외부에서 성능 좋은 에너지 충전기가 도착하기를 응원하는 마음인 게다.
이제 그때가 왔다. 배우 최덕문의 제법 큰 배를 충분히 띄우고도 남을 물(대중의 관심과 사랑)이 당도할 듯하다. 인기 절정의 OTT 드라마 ‘운수 오진 날’(감독 필감성, 제작 스튜디오드래곤·더그레이트쇼·스튜디오N, 제공 티빙),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것이라 믿고 싶은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감독 김한민, 제작 ㈜빅스톤픽쳐스,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에서 최덕문이라는 별이 반짝반짝 잘 보인다.
‘운수 오진 날’의 감독 필감성, ‘노량: 죽음의 바다’의 김한민 감독은 배우 최덕문이 무엇을 가장 잘하고 어떤 걸 맡기면 제일 잘 어울리는지를 정확히 아는 연출자들이다. 최덕문 배우의 ‘전공과목’으로 기용했다.
배우 최덕문의 전공(어디까지나 현재 시점)은 한 사람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반려자, 평생 친구, 의형제다.
‘운수 오진 날’에서 최덕문은 연쇄살인마를 자신의 택시에 태운 기사 오택(이성민 분)이 일하는 소망운수의 정비팀장이자 죽마고우 고주환을 맡았다. 드라마에 적시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후배의 사기극에 ‘바지사장’이 됐다가 덤터기를 쓰고 쫄딱 망한 오택을 택시 기사로 취직해 줬을 것이다.
아빠 체면 한번 세워보겠다고, 이혼한 부인(우미화 분)과 재결합해 가족과 함께 살아보겠다고, 딸 승미(정찬비 분)의 대학교 등록금을 긴급으로 마련할 때도 오택이 가장 먼저 전화할 수 있고 거절 없이 비상금 내어주는 친구가 고주환이다. 여러 친구가 십시일반 도운 가운데, 주환 같은 친구가 한 명만 더 있었어도 ‘따블’(2배) 택시요금 백만 원에 현혹돼 피도 눈물도 없는 연쇄살인마(유연석 분)를 태우고 목포까지 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딸과 심적 아내마저 잃고 복수에 눈이 멀어 미친 듯 ‘그놈’을 추격할 때, 아직 미성년이었던 아들 승현(홍사빈 분)을 염치없지만 믿고 맡겼던 친구도 주환이었다. 승현은 주환네 밥을 먹고 자라고 주환과 함께 정비소에서 일하고 주환의 딸 채리(기은수 분)와 가정을 꾸린다.
그렇게 넉넉한 품으로 친구 택이를 끌어안았던 주환에게 크나큰 사건이 터진다. 연쇄살인마가 채리를 납치했다. 보통의 누구나 화가 나고 억울하고 후회할 법하다. 내가 택네를 건사해 주다가 내 딸에게 불행이 닥쳤구나, 괜한 오지랖을 부렸구나! 모든 게 복수하겠다고 그놈을 쫓은 오택 너 때문이야, 내 딸 살려내!
하지만 고주환은, 채리의 아빠는 딸의 부음을 듣자마자 혼절할 만큼 정신줄을 놓으면서도, 친구 오택이 경찰의 추적망에서 벗어나도록 통신을 흐트러뜨린다. 물론 그 마음엔, 그래 택이 네가 내 원수까지 갚아다오! 하는 인간적 마음도 컸을 것이다.
친구는 어려울 때 알아본다고 하던가. 내가 경제적으로 바닥을 치게 됐을 때, 가족을 잃고 인생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라면, 로또 1등 당첨 용지를 욕심내지 않고 서슴없이 건네주는 친구라면, 혈연 그 이상의 의미 아닐까. 그 ‘의미’의 자리에 배우 최덕문이 서 있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배우 최덕문에게 이순신(김윤석)의 오른쪽에 항상 서 있는 충신 송희립이 맡겨졌다. 가내에 방 씨 부인(문정희 분)이 있다면, 전장에서는 송희립이 있어 이순신의 속내를 살뜰히 살피고 대의를 의심 없이 지지하고 그 큰 뜻이 말단의 병사에게 퍼지도록 명령을 고스란히 전한다. 명에서 지원군으로 온 수군 도독 진린(정재영 분)과 대화할 때는 중국어 통역사로도 나섰다.
단 한 번, 송희립이 이순신의 진격 명령에 머뭇거린 순간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명령 불복이나 불신 차원이 아닌 모두의 정신적 지주이자 다시 없을 해군 제독의 안위를 우려한 것이었다. 물론, ‘이대로 왜군을 돌려보내서는 임진년에 발발해 7년이나 지속된 왜란의 진정한 끝일 수 없고, 일본 앞바다까지 쫓아가서라도 제대로 된 항복을 받아낸다는 각오로 적군을 마지막까지 섬멸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대의를 눈빛으로 받들어 우렁찬 목소리로 전군에 진격을 외치는 이가 송희립이고, 이때 배우 최덕문의 목소리는 전장의 온갖 굉음을 뚫고 승리의 깃발을 올리듯 전율을 일으킨다.
영화 ‘명량’과 ‘한산: 용의 출현’에 이어 ‘이순신 영화’ 3부작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량: 죽음의 바다’를 보노라면 이순신 장군이 실로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될 만큼 배우 김윤석의 연기에 믿음이 간다. 특히나 작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통해 만난 이순신의 숨결이 짙게 느껴진다. 첫째는 배우 김윤석이 지·덕·체가 하나 된 명장 이순신의 폭과 깊이를 유감없이 구현해 낸 덕이다.
둘째는, 바로 곁에 선 자, 김윤석이 표현한 이순신을 ‘살아있는 이순신’으로 믿고 따르고 추앙하는 배우 최덕문의 진심이 ‘기적의 판타지’를 완성한다. 최덕문부터 믿었기에 우리가 그를 진짜 이순신으로 여기고 노량 앞바다에서 동이 트도록 펼쳐진 죽음의 해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투 톱 주연으로 버디 무비를 찍을 때뿐 아니라, 극 중 서사구조에서 원 톱 주인공과 나란히 세우려면 해당 배우와 동급의 에너지를 지녀야 가능하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의 김윤석, 드라마 ‘운수 오진 날’의 이성민,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연기 마스터들이다.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배우 최덕문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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