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왼쪽부터) 염혜란 이정은, 사진=티빙, 에이스팩토리, 준필름 |
배우 라미란의 별명은 ‘라미란로즈’다. 그룹 아이즈원의 노래 ‘라비 앙 로즈(La Vie En Rose)’에서 비롯된 별명인데 ‘라비 앙 로즈’의 원래 뜻은 ‘장밋빛 인생’이다.
장미는 피어날 때 막대한 양의 빛과 양분, 물, 정성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장미가 피어나는 순간은 인생의 최고로 기쁜 순간, 희열의 찰나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정도의 꽃을 피어 올리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 정성들로 표현된다.
이를 배우로 치환하면 인고의 세월을 지낸 이의 인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라미란이 그 예시다. 그런데 장미는 혼자 있을 때도 아름답지만 모여서 필 때가 아름답다. ‘라미란로즈’는 단순히 한국 드라마, 영화판에 피어난 한 떨기 장미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로 이정은, 염혜란 등의 배우들로 이어지는 ‘하나의 띠’를 형성한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결속을 바탕으로 매 작품 이전 모습을 지우는 괴물 같은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나쁜엄마’ 라미란, 사진=드라마하우스스튜디오,SLL,필름몬스터 |
라미란은 올해 JTBC ‘나쁜엄마’의 진영순 역을 통해 처절한 운명을 맑게 헤쳐 가는 진영순 역으로 인상을 남겼다. 소시민적이면서도 처연하고 그러면서도 건조한 연기가 돋보였다. 티빙 ‘잔혹한 인턴’에서는 7년 만에 일터로 돌아온 ‘경력단절녀’ 고해라를 연기했다. 유독 눈물이 많았던 올해 드라마 속 라미란의 활약은 드라마 ‘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으로 이어진다.
이정은 역시 지난해 ‘우리들의 블루스’ ‘욘더’ ‘미씽:그들이 있었다 2’를 비롯해 올해 티빙 ‘운수 오진 날’, 넷플릭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등에 등장할 예정이다. 세파에 찌든 것 같지만 나름의 단단함이 있고, 애절함도 있는 소시민적인 캐릭터는 이정은의 연기를 통해 살아 힘을 얻었다.
염혜란은 2023년 9월 지금, 가장 각광을 받는 배우 중 하나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강현남을 통해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의 연기를 보여주더니 tvN ‘경이로운 소문 2’를 통해서는 액션도 선보였다. 그 정점은 넷플릭스 ‘마스크걸’에 있었다. 그는 복수에 눈이 멀어 자신의 온 생을 갖다 바치는 김경자로 분했다. 아들 주오남(안재홍)의 사망 사실을 알고 오열하던 장면 그리고 복수를 위해 차를 몰고 돌진하던 당시의 광기는 염혜란의 눈을 통해 형형하게 살아났다.
언뜻 관계없을 것 같은 세 사람의 연결고리는 여러 군데 있었다. 우선 연극이다. 서울예대 연극과를 나온 라미란은 2005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오수희 역을 맡기 전까지 연극무대에 몸담았다. 이정은 역시 연출 전공으로 연극을 먼저 겪었다. 데뷔작인 ‘한여름 밤의 꿈’을 시작으로 ‘라이어’ ‘장석조네 사람들’ ‘슬픈 인연’ ‘잔치’ 등에 출연했다.
2008년 뮤지컬 ‘빨래’에서 노파와 여직원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그는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연기’에 스카우트되기 시작했다. 2009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를 통해 본격적인 영화출연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들의 블루스’ 이정은, 사진=tvN |
염혜란은 ‘연우무대’를 통해 연극에 들어섰다. 2000년 데뷔해 20년 가까이를 무대에서 지냈다. ‘차력사와 아코디언’ ‘눈 먼 아비에게 길을 묻다’를 거치며 봉준호 감독의 눈에 들어 2003년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연극에 투신하던 당시부터 서로의 연기를 지켜보던 그들이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서 호흡을 맞췄던 것은 드라마에서였다. 이정은과 염혜란은 2019년 KBS2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만났다. 그해 KBS ‘연기대상’의 각종 수상부문을 석권하며 ‘괴물 같은’ 컬래버의 시작을 알렸다.
바로 그 시상식에서 라미란과 이정은의 ‘묵은 정’도 빛났다. 이정은이 당시 우수상 중편 드라마 부문상을 수상했는데, 시상자로 나온 라미란이 이정은의 수상을 축하하며 오열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라미란과 염혜란의 연결고리도 굵고 단단하다. 염혜란은 자신이 처음 대중에 소개되기 시작하던 시점부터 자신을 ‘제2의 라미란’이라고 소개했다. 라미란이 이 소개에 부담을 느껴 말리기도 했지만, 염혜란은 이를 멈추지 않았다.
라미란과 이정은, 염혜란 등 세 배우들은 연극에서 기반을 다진 후 소시민적 캐릭터로 이름을 알리고, 지금은 각자의 연기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서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발언을 아끼지 않는다.
‘마스크걸’ 염혜란, 사진=넷플릭스 |
그들의 성공가도는 분명 이전에는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었다. 항상 TV 안은 예쁘고 잘생긴, 훤칠하고 날씬한 배우들의 전시장이었으며 깊은 내공의 연기는 TV 밖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분량의 한계에 잡혀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조금씩 변했다. TV보다 깊고, 영화보다 편한 OTT 플랫폼의 등장은 이들의 연기를 조금 더 지켜볼 수 있게 해주는 여유를 제공했다.
‘응답하라 1988’의 라미란, ‘기생충’의 이정은, ‘더 글로리’의 염혜란처럼 자신의 인생 캐릭터를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집중력을 보인 세 사람이 주목받는 계기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작품마다 지난번 자신의 캐릭터를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캐릭터를 대중의 마음속에 새기는 맹활약으로 ‘장밋빛 인생’ 가도를 달리고 있다.
장미는 사시사철 필 수 있지만, 날씨에 강하고 꽃이 잘 지지 않는다. 어쩌면 ‘장밋빛 인생’이란 어려운 기간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그 개화기간이 오래이길 바라는 바람일 수도 있다. 배우로 친다면 이들과도 같다. 오래 묵혀온 열정이 장미처럼 피어나는 지금의 시기, 우리는 즐겁게 이 셋의 연기를 기다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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