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마스크걸’ 속 광기 어린 엄마 연기 펼쳐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왜곡된 모성에다 편협한 시각 때문”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 “김경자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캐릭터였어요. 약하고, 멋지지도 않은 늙은 여성이 빌런(악당)이라뇨!”
‘더 글로리’부터 ‘마스크걸’까지. 배우 염혜란(47) 뒤에는 ‘올해 넷플릭스의 중심’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더 글로리’의 ‘매 맞지만 명랑한’ 가정 폭력 피해자 강현남 역으로 정점을 찍은 듯한 연기를 선보이더니, 이번에는 ‘마스크걸’ 속 김경자의 광기 어린 연기로 또 한 번 자신의 한계를 깨부쉈다.
2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염혜란은 “김경자 같은 빌런이 나오는 시대를 살 수 있어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경자는 여느 엄마 캐릭터들과 달리 훨씬 확장된 느낌이었고, 작품이 그녀의 모성을 다루는 방식도 전형적이지 않았다. 신선하고, 새로운 캐릭터라서 끌렸다”고 밝혔다.
김경자는 기와 깡으로 버티며 살아온 억척스러운 인물이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새살림을 차린 남편과 이혼하고 건물 청소, 배달, 가사 도우미, 택시 기사 등 온갖 일을 전전하며 남은 자식 하나 번듯이 키우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렇게 키운 아들 주오남(안재홍 분)이 어느 날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자, 김경자는 무너져 내린다.
염혜란은 토막 난 채 발견된 시신이 주오남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장면을 캐릭터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으로 꼽았다.
그는 “김경자는 ‘내 아들만 아니면 됐다’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그의 편협한 모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며 “내 자식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의 자식도 소중한 게 당연한데 김경자는 왜곡된 모성을 품고 있다”고 짚었다.
아들을 잃은 김경자는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엄청난 집착과 광기에 사로잡힌다. 초인적인 정신력과 생존력으로 아들을 죽인 김모미를 끝까지 추적하고, 심지어 죄 없는 그의 딸 김미모에게도 접근해서 치밀한 뒷공작을 펼친다.
염혜란은 김경자가 엄마로서 품고 있는 죄책감을 부각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김경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삶이 바빠 아들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다”며 “아들이 학창 시절 괴롭힘을 당할 때 더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죄책감,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경자의 환상 속에서 아들이 ‘내가 부끄러웠지?’라고 묻는 장면이 있어요. 원래 대사는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라며 부인하는 거였는데, 감독님께 그냥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씀드려서 대사를 그렇게 바꿨죠.”
김경자의 가장 큰 특징은 비뚤어진 모성이지만, 염혜란은 김경자가 모성 하나로 정의되지 않기를 바랐다고 강조했다. 김경자가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단순히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염혜란은 “모성으로 모든 행동을 설명하는 건 너무 쉽고 뻔하다고 생각했다”며 “김경자를 미치게 만든 건 바로 그의 편협한 시각 때문”이라고 했다.
“김경자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인정하지 못하고, 젊은 세대와도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모습이 여러 번 비치죠. 그렇게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점점 극단적으로 변하고, 급기야 악을 응징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게 되는 거예요.”
1999년 극단 ‘연우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염혜란은 연극을 보러 온 봉준호 감독의 눈에 들어 영화 ‘살인의 추억'(2003)으로 데뷔했다.
이후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 드라마 ‘도깨비'(2016), ‘동백꽃 필 무렵'(2019), ‘라이브'(2018), ‘경이로운 소문’ 시리즈, (2020·2023) 등에서 자신만의 색깔 있는 연기를 펼치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10살 차이 나는 안재홍의 엄마를 연기한 ‘마스크걸’ 이전에도 염혜란은 나이에 비해 연배가 있는 역할을 자주 맡아왔었다.
그는 “노안이라 그런지 예전부터 나이 든 캐릭터를 자주 연기했다”며 “이번에도 댓글 보니까 사람들이 ‘고현정이 선배 맞느냐’고 하더라”며 화통하게 웃었다.
‘연기파’로 손꼽히는 주연급 배우로 자리매김한 만큼 이제 엄마가 아닌 다른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갈증은 없을까.
염혜란은 “미디어 속 정형화된 엄마가 되는 게 싫은 거지, 엄마의 역할은 절대 싫지 않다”고 답했다.
그는 “시대를 잘 만나서 이제 엄마들도 주인공이 되는 시대가 왔다”며 “‘더 글로리’ 속 현남과 ‘마스크걸’의 경자가 다르듯이, 앞으로도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엄마를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올해는 마치 수확한다는 느낌이에요. 풍성하고 행복한 한 해인 것 같은데, 성격상 행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만큼 불안도, 걱정도 큽니다. (웃음) 다음 작품으로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결과와 상관 없이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담담한 작업자가 되고 싶어요.”
co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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