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밀의 언덕’ 이지은 감독…가족이 창피한 어린이 그려
(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아이들은 때론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의 달인이 된다.
12일 개봉하는 영화 ‘비밀의 언덕’ 주인공 명은(문승아 분)이 그렇다. 가정환경 조사 시간, 명은은 부모님 직업이 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거짓으로 답한다. 아이들이 귀를 쫑긋 세운 채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명은은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정주부와 회사원으로 각각 둔갑시킨다.
1996년 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비밀의 언덕’은 가족의 실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5학년 명은의 분투를 그린다. 어린이의 감수성과 성장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 영화는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어린이·청소년 영화 부문에 초청됐고 전주국제영화제 등 국내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5일 서울 동작구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만난 이지은 감독은 “작지만, 의지로 가득 차 있고 뜨거운 인물을 그리려 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 10대에게 접근하고 싶었다”고 명은이라는 캐릭터에서 역점을 둔 부분을 설명했다.
명은은 ‘정상 가족’을 가진 것처럼 보이려고 부지런하고 치밀하게 가짜 세계를 구축한다. 기발한 방법을 동원해 친구들과 선생님을 속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의아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이 감독은 명은을 두고 “이명은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는 제 모습이 많이 투영된 인물”이라면서도 “명은이처럼 (거짓말을) 해본 적은 없지만, 제가 원하던 이상적인 인물이긴 하다”며 웃었다.
이 감독 말처럼 극이 전개될수록 관객은 묘하게 명은의 거짓말을 응원하게 된다. 명은의 엄마·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반 아이들 앞에서 폭로하는 남자아이의 꿀밤을 때려주고 싶어질 정도다. 어릴 적 부모님이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는 관객이라면 명은에게 더 깊이 이입할 듯하다.
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부모와 친구의 부모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끝내 창피해할까.
이 감독은 “교과서에서 묘사하는 스테레오타입의 부모님 모습이 아니면 아이들은 ‘이게 아닌가’, ‘우리 부모님은 별난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다양한 모습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거 이상한 거 아니야’ 하고 말해주는 거죠. 한편으로는, 센스있는 어른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배려해주는 그런 사람이요. 아이들이 ‘나도 커서 저런 어른이 돼야지’ 할 수 있는.”
‘비밀의 언덕’에도 이런 센스 있는 어른들이 많이 등장한다. 가족의 정체를 고백하는 명은의 글이 신문에 실리게 되자 상을 무를 수 있도록 도와준 선생님, 막노동을 하면서도 명은을 데리러 학교에 갈 때면 양복을 차려입는 외삼촌, 명은에게 옷을 사주라며 엄마를 타박하는 시장 아줌마 같은 사람들이다.
“제 주위에도 이런 어른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 덕분에 어른인 저 역시도 행복을 느낍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보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을 만날 때면 아직 세상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감독은 명은을 내내 거짓말쟁이로 남겨두진 않는다. ‘비밀의 언덕’은 말하자면 “엄마는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라고 거짓말하던 명은이 부모 직업란에 ‘젓갈 가게’라고 비로소 쓰게 될 수 있기까지의 여정을 살핀다.
명은이 변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자신의 어머니를 “아가씨 술집 사장”으로 소개하는 전학생 혜진(장재희)을 만나면서다. 자기와 정반대의 혜진을 보며 명은은 솔직해질 용기를 얻는다.
“명은이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어른들에게도 ‘솔직해야 할까 아니면 거짓을 섞어야 할까’라는 고민이 중요한 화두라 생각했습니다. 내 모습을 다 보여줬을 때 내가 얻게 될 이득과 손실, 상대와의 관계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관객들도 ‘비밀의 언덕’을 보고 이 주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ramb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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