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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마주친, 진기주의 지난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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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KBS 2TV
/사진=KBS 2TV

“엄마에게 그런 시간이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뿐이었을까. 내가 알지 못했던 엄마의 순간들은. 그동안 나는 엄마의 시간을 얼마나 놓쳐왔던 걸까”

KBS 2TV ‘어쩌다 마주친, 그대’ 제작발표회에서 진기주가 소개한 백윤영의 대사다. 별다른 요청이 없었음에도 대본에서 대사를 직접 적어와 소개한 진기주는 “이 내레이션에 홀딱 반했다. 어렸을 적 엄마를 보고 친구가 될 수 있고, 그 시절 엄마가 어떤 것을 꿈꿨는지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다”고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진기주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 내레이션이 언제, 어떻게 등장할까를 기다리는 것은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보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됐다.

이 내레이션은 3화 초반부에 등장했다. 엄마 순애과 자신의 직장 상사 고미숙이 아는 사이였으며 고미숙의 데뷔작 ‘작은 문’이 사실은 엄마의 작품이었다는 사실, 당시 엄마가 동급생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충격에 빠진 백윤영이 거울을 보며 내뱉은 독백이었다. 윤영의 독백과 함께 ‘나도 한때는 소설가가 꿈이었다’던 엄마의 말을 흘려들었던 것이나 사인한 책을 한 권 달라는 말에 ‘읽게 엄마가?’라고 반문했던 윤영의 과거 행동들이 모진 가시가 되어 다시 자신을 찔렀다. 담백하지만 회한이 섞인 진기주의 내레이션과 무심한 윤영의 모습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많은 시청자들을 자극했다.

/사진=KBS 2TV
/사진=KBS 2TV

만약 백윤영이 이러한 상황에 단순히 슬퍼하기만 했다면 그다지 매력적인 캐릭터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윤영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동안 자신이 놓쳐왔던 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윤영은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받는 순애의 든든한 방패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된다. 순애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애잔함은 모녀 관계가 뒤바뀐 모양새다. 엄마가 사망한 후에야 엄마의 사랑을 깨달았던 윤영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돌려주는 모습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현실에는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애가 위기에 처하거나 훗날 아빠가 되는 희섭과 엮이는 순간에는 따뜻했던 모습이 순식간에 불같은 모습으로 번져나간다. 특히 엄마의 밝은 미래를 위해 아빠와의 만남까지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는다.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못한다면 미래의 자신도 존재할 수 없지만, 이미 많은 것을 놓친 백윤영에게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순간순간의 감정에만 휘둘리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인다. 미래의 시점에서 순애는 이미 사망한 상태다. 윤영은 엄마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윤해준(김동욱)과 분주히 뛰어 다닌다. 감정적인 모습과 워맨스가 강조된 순애와의 관계와 달리 ‘우정리 연쇄사건’을 중심으로 해준과 공조해 나가는 모습에서는 차분하고 이성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진기주는 이렇게 때로는 감정을 절제하며 아껴두고 때로는 아껴뒀던 감정마저 한순간에 터뜨리며 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사진=KBS 2TV
/사진=KBS 2TV

진기주가 이렇게 다채로운 백윤영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이유는 진기주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윤영의 모습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진기주는 배우 데뷔 전 대기업 컨설턴트와 방송 기자 생활을 했던 이력으로 조명받았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이나 어렸을 적 아버지를 보고 꿈을 키웠던 기자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배우의 길을 택한 진기주는 보통의 배우들보다 늦게 데뷔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반대도 있었고, 신인치고는 많은 나이 탓에 오디션에도 많이 떨어졌다. 상처도 받았지만 진기주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다채로운 성장세를 보여주며 단숨에 주연급 배우로 성장했다.

회사원과 기자로 보낸 시간은 배우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었다. 비단 역할과 캐릭터의 문제가 아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보통의 삶을 지나온 진기주는 이러한 경험과 감정을 작품에 녹여냈다. tvN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진기주는 대기업 재직 당시 ‘너 힘들면 하고 싶은거 해’라는 엄마의 위로에 “처음에는 짜증을 냈다”고 말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제작 발표회에서도 “저를 사랑과 헌신으로 키워준 엄마에게 좋은 딸은 아니라 반성도 담기고 엄마에게 선물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과거로 돌아간 윤영이 순애에게 보여주는 아가페적 사랑은 어쩌면 인간 진기주가 자신의 엄마에게 전하고 싶은 말과 행동일 수 있다. 2021년의 윤영이 어쩌다 1987년으로 돌아가 엄마를 마주치며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 것처럼, 2023년의 시청자들은 백윤영을 통해 진기주의 과거를 마주치며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

머니투데이
content@www.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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