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글로리’, 송혜교 사진제공=넷플릭스 |
그가 나타나면 샤랄라한 BGM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입을 벌린 채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조금 과장됐지만, 송혜교가 그간 연기한 캐릭터들에 대한 것이다. 하얗고 고운 피부와 붉고 도톰한 입술, 그 위로 반짝이면서도 우수에 찬 눈을 가진 그는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에 더해 멋있고 당당함과 동시에 당차고 색채감 넘치는 워너비 여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가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극본 김은숙, 연출 안길호)에서 학교폭력으로 처절한 복수의 삶을 사는 인물에 캐스팅 됐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품게 한 이유다. 이렇게 예쁜, 심지어 워너비형 배우가 학교폭력 피해자를? 그러나 방송 전 김은숙 작가는 “가편 속 송혜교의 연기에 소름이 끼쳐서 입을 떡 벌린 채 아무것도 못했다”고 장담했다.
송혜교는 오랫동안 자신의 외모와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캐릭터들의 프레임을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다. SBS ‘지금 헤어지는중 입니다’의 영은은 예쁜데 일도 잘하고 똑부러지는 패션회사의 디자인팀 팀장이었고, tvN ‘남자친구’의 차수현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똑똑하고 예쁜데 연예인만큼 유명한 워너비형 여성이었다. KBS2 ‘태양의 후예’의 강모연도 얼굴 예쁘고 실력 좋은 특진병동 VIP 담당 교수이자 흉부외과 전문의였고,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영도 위태로워 보이지만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대기업 상속녀였다. 가난과 폭력, 외로움에 찌들어 홀로 고통을 견뎌내는 ‘더 글로리’의 문동은은 송혜교가 거쳐 온 작품 속 캐릭터들과는 확실히 궤가 다르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당당하고 예뻤으며, 바닥이 아닌 하늘과 더 맞닿아 있었다.
‘더 글로리’ 송혜교(왼쪽), 사진제공=넷플릭스 |
하지만 ‘더 글로리’ 속 송혜교의 얼굴은 혼자 상처를 감내하고, 상실감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철저하게 바닥에 머물러 생존한다. 그가 입고 나오는 색감없는 의상만큼이나 온통 모노톤인 동은의 세상은 오직 흑백만이 공존하고, 분노와 아픔이라는 단 두 가지 감정만으로 시청자에게 들끓는 감정을 피어낸다.
송혜교가 데뷔 이래 처음으로 연기하게 된 복수자의 모습은 확실히 낯설다. 동은은 바닥을 기거나 몸부림을 치며 폭력이 자리한 곳을 강박적으로 긁고, 초점 잃은 눈동자로 복수의 대상을 멀리서 훔쳐보며 김밥을 입에 욱여넣는다. 가난하고 초라한 음지에서도 가장 맨 뒤에 놓여있다. 허나 차갑지만 뜨겁고, 향기롭지만 비릿하다. 상처는 입되 무너지지 않고 버틴다. 높은 자를 향한 낮은 자의 복수가 결코 가볍거나 우스워 보이지 않게 꽤나 단단한 얼굴로. 새로운 것에서 더 새로운 것, 송혜교는 동은을 이용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 자신의 얼굴을 새롭게 쓰고 있다.
”더 글로리’ 송혜교, 사진제공=넷플릭스 |
뒷모습마저도 애처로운, “송혜교 연기 미쳤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절대 괜한 말이 아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돌아온 송혜교가 이 작품을 택하고 촬영했던 나이는 마흔이다. 여성 배우에게 또 다른 편견이 덧씌워지는 40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그는 “늘 먹던 것”이 아닌 다른 차림표를 골랐다. 때문에 ‘더 글로리’는 그 어떤 영역에서도 잘 머무를 수 있다는 송혜교의 뼈를 갈아 외친 선포같기도 하다. 알록달록한 색채를 덜어낸 모노톤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멋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증명하며 말이다.
“송혜교에게 이런 표정과 목소리, 걸음걸이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며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말했던 김은숙 작가의 발언은 빈소리가 아니었다. 분노와 증오로 빛 한 점 없는 극야의 시간을 버텨온 인물을 송혜교는 격렬하게 껴안았다. 워너비형으로 대표되던 여성 배우가 아름답고 예쁘기보다 철저하게 무너지는 걸 보여주며 택한 변화는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어린 나이에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고 잠시 정체도 겪었던 송혜교가, 이제 자신의 가치를 더 넓게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건강함마저 갖추게 됐다. 그래서 확신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톱스타였던 그의 20~30대 때처럼, 40대의 송혜교 역시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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