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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걸쳐 있으면 욕을 먹지만, 시원하게 선을 넘어 버리면 선은 무의미해진다.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은 아예 선을 지워버리고 출발한다. 오프닝 내레이션에서 지구와 닮은 행성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쓰고 있다고 가정하며, ‘이상하게 익숙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당신의 착각’이라고 능청스럽게 선언한다. 익숙한 조선시대라는 세계관은 가져오되, 역사와 고증 논란에서 자유롭고 싶다는 소리. 뻔뻔하고 발칙하지만, 이렇게 솔직하게 나오면 도리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법이다.
‘금혼령, 조선 혼인 금지령’(이하 ‘금혼령’)은 동명의 웹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으로, 7년 전 세자빈을 잃고 금혼령을 내린 왕 이헌(김영대) 앞에 죽은 세자빈으로 빙의할 수 있다는 혼인 사기꾼 소랑(박주현)이 나타나 벌이는 센세이셔널 궁궐 사기극을 표방한다. 조선 왕실에서 임금을 비롯 왕자와 왕녀의 배우자를 고르는 간택 제도는 원칙상 양인 집안의 자식이면 누구든 대상자였고, 간택이 진행되는 시기 동안에는 어떤 집안도 혼인을 할 수 없는 금혼령이 내려지곤 했다. 왕실의 혼사인 만큼 ‘양인 집안의 누구나’는 아니고 대개 양반가 중에서도 누대에 걸친 명문가가 주를 이루는 최상류층의 일이었지만, 어쨌든 원칙상 금혼령이 내려진 것은 사실. 왕의 혼인을 이유로 나라 전체의 혼인을 7년이나 금지한다는 설정부터가 ‘역덕’(역사 덕후)이 아니어도 무리한데, ‘금혼령’은 아예 조선이라는 우주의 다른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눙치며 철저하게 픽션임을 강조하여 논란을 피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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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7년이나 금혼령이 지속되니, 나라의 불만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다. 신하들은 대놓고 왕인 이헌 앞에서 ‘왕이 고자이거나 남색 아니냐’는 저잣거리 소문을 물어 나르며 능멸을 가하는 중이고, 소랑 같은 사기꾼 궁합쟁이는 호패를 조작해 혼인이 허락되는 나이로 만들어 혼사를 이어주는 일을 하며 혼인할 수 없는 위기의 시대를 기회로 삼는다. 이조판서의 첫째 딸 예현선이었던 소랑이 저자의 사기꾼 궁합쟁이로 살아가는 이유도 금혼령이 이유였고, 예현선과 혼인할 예정이었던 이신원(김우석)이 먼 발치에서 보았던 정혼자 현선을 잊지 못하고 7년째 그를 찾아다니게 되는 것도 금혼령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왕인 이헌의 뜻은 아니다. 이헌이 세자빈 안씨(김민주)를 지극히 사랑하여 비명에 갔던 그를 절절하게 그리워하는 것은 맞으나, 그간 있었던 간택령에서 유력한 후보들이 소리소문없이 죽어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니 ‘금혼령’은 사랑의 상처가 있는 이헌의 배우자를 찾는 로맨스물이자 세자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히고 여전히 왕의 간택에 훼방을 놓는 무리를 찾는 수사물의 형식을 띠게 된다.
설정 자체가 뻔뻔하고 발칙하니, 그 판에서 뛰노는 배우들의 활약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요즘 지상파 드라마들이 대부분 그렇듯, ‘금혼령’ 역시 무게감 있는 스타 배우보단 젊고 신선한 라이징 스타들로 주연진을 채웠다. 박주현, 김영대, 김우석 모두 사극이 처음인지라 분명 어색한 부분이 많고, 연기 또한 가끔 실소가 터져 나올 때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 드라마는 철저한 픽션. 정통 사극의 부담을 덜어낸 만큼 드라마의 과한 설정과 디테일을 너그럽게 봐주는 만큼 배우들의 연기도 귀엽게 봐주게 되는 효과가 있다. 특히 ‘인간수업’으로 얼굴을 알린 박주현의 활약은 지켜볼 만하다. 방영된 1, 2화는 박주현의 맹활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양반가 여식이었다가 음모에 휩쓸려 사기꾼 궁합쟁이로 살아가는 소랑이라는 능동적인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낸다. 위기 앞에서 월하노인에 빙의한 척, 세자빈에 빙의한 척 꼼수를 부리는 능청스러운 모습은 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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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캐릭터가 물 만난 고기처럼 생동감 있게 뛰노니, 그와 삼각관계를 이룰 것으로 보이는 이헌과 이신원 역의 김영대와 김우석의 연기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아직 아슬아슬할 때가 많지만 연기 경력이 길지 않은 20대 배우임을 감안하며 성장을 지켜볼 여유가 생긴달까. 여기에 양동근, 박선영, 최덕문, 황정민 등 젊은 배우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중량급 배우들이 등장하며 아슬아슬함을 덜어낸다.
12부작 ‘금혼령’은 이제 막 발을 내디뎠다. 동시간대에 ‘재벌집 막내아들’ 같은 화제작이 배치돼 있어 제작진은 ‘언더독’의 심정을 내비쳤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부담없이 나아갈 수 있다. ‘비아거라’ ‘모태설로’ 등 21세기의 설정을 빗댄 디테일을 듬뿍 담아내고, “이거 마시면 우리 동무하는 거다?” 같은 패러디로 웃음을 전면에 내세우는 ‘금혼령’에 핏대 세우며 ‘그건 아니지’라고 트집을 잡는 건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정통사극 마니아인 ‘역덕’들의 마음을 잠재웠으니, ‘금혼령’은 거칠 것없이 내달릴 일만 남았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아니던가. ‘중꺾마’의 감동을 ‘금혼령’이 실현할 수 있을지 지켜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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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 드라마가 조선이라는 멀티버스 세계관을 내세워 역사와 자유롭긴 하지만, 그간 ‘해를 품은 달’ ‘간택-여인들의 전쟁’ 등 간택이 중요한 소재였던 드라마를 생각하면 ‘금혼령’ 또한 어느 시대의 이야기에 모티프를 얻은 걸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세자빈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이어지지 못했다는 이헌의 설정에선 소현세자의 야사가 살짝 떠오른다. 민회빈 강씨 이전에 윤의립의 딸이 소현세자의 배우자로 거론되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는데, 멀리서 윤의립의 딸을 보고 마음에 들어 한 소현세자가 이 때문에 민회빈 강씨를 소원하게 대했다는 것. 물론 야사이니 믿거나 말거나. 두 번이나 불미스러운 일로 세자빈이 폐출된 세종의 며느리 이야기도 살짝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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