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자긍심 상징이었던 ‘007’ 통제권 인수에 실망
영국 첩보물 대명사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창작권이 미국 아마존 MGM 스튜디오에 넘어갔다. 007 시리즈의 지식재산권 공동 소유주 바버라 브로컬리와 마이클 G 윌슨은 여전히 IP를 공동으로 소유하지만 향후 영화의 주요 결정권은 MGM이 갖게 됐다고 밝혔다.

‘007’ 시리즈는 1962년 첫 영화 ‘닥터 노'(Dr. No)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2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되며,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이자 전통 첩보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무엇보다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로 미국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상황에서도 영국 영화계의 자존심을 지켜온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제임스 본드 역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등장해, ‘007’ 시리즈의 국가적 상징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영화 시리즈를 넘어 영국인들의 자긍심이자 문화, 경제, 정치적 자산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기업 아마존이 ‘007’ 시리즈의 창작 통제권을 인수하게 되면서, 시리즈의 향후 변화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제기되고 있다. 이는 세계 콘텐츠 시장의 흐름과 문화적 권력의 이동을 상징하는 중요한 변화로 여겨진다.
‘007’이 미국의 엔터테인먼트에 넘어갔다는 것이 피부로 다가온 건 지난 3일 열린 제9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블랙핑크 리사가 영화 ‘007 리브 앤 렛 다이'(Live and Let Die)를 열창했으며 도자캣, 레이도 각각 영화 ‘007’ 시리즈의 주제곡인 ‘다이아몬즈 아 포에버'(Diamonds are forever), ‘스카이 폴'(Skyfall)을 불렀다. 여기에 ‘서브스턴스’로 대세가 된 마가릿 퀄리가 ‘007’ 시리즈 사운드 트랙에 맞춰 탱고 무대를 선보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007’ 헌정 무대를 꾸민 것을 두고, 시리즈의 변화와 새로운 출발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007의 장례식’으로 냉소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007’ 시리즈의 통제권을 갖게 된 아마존은 2006년 구독형 OTT 플랫폼 프라임 비디오를 서비스하며 영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2022년에는 ‘007 시리즈’ 배급권을 보유한 MGM 스튜디오를 인수했다. 아마존은 자체 OTT 서비스인 프라임 비디오를 통해 ‘007’ 시리즈를 보다 다양한 형태로 선보일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이는 기존의 극장 중심의 경험을 넘어 구독 경제와 스트리밍 문화에 맞춘 새로운 콘텐츠 소비 방식을 도입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마존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제작 역량을 활용하면, ‘007’ 시리즈가 OTT 시리즈나 스핀오프를 통해 젊은 세대와 새로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아마존이 자랑하는 데이터 기반의 맞춤형 콘텐츠 전략을 통해, ‘007’ 시리즈의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려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007’ 시리즈는 영국의 클래식하고 전통적인 감성을 대표해왔는데, 이러한 정체성이 미국 플랫폼의 글로벌화 전략 속에서 희석될 수 있다는 걱정이다. 아마존이 ‘007’ 시리즈의 창작권을 가져온 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국 현지에서는 미국 기업이 통제권을 갖게 된 이상 자본주의에 의해 영국만의 클래식한 감성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 더 컸다.
현재 ‘007’ 시리즈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시리즈는 2018년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지막 시리즈인 ‘007 스펙터’ 이후로 구체적인 소식은 없는 상황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진화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게 될 지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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